제1화 이젠 괜찮아
남편 진태경에게 정성껏 끓인 국을 가져다주려던 강지연은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쏜살같이 달려오는 대형 트럭이 그녀의 머리 바로 앞까지 들이닥쳤지만, 다행히 순발력 있게 피한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다.
병원에서 수술 동의서에 보호자 서명이 필요하다고 연락했을 때, 그녀는 진태경에게 수십 통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단 한 통도 받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건 전화마저 퉁명스럽게 끊어버리더니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보내왔다.
[강지연, 나 지금 엄청 바쁘니까 헛짓거리하면서 내 시간 뺏지 마.]
친한 친구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두 다리 모두 성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꼬박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진태경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퇴원 수속을 밟던 바로 그날, 드디어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 다은이가 다쳐서 수혈이 필요해!]
강지연은 휴대폰을 움켜쥔 채, 감정 없는 냉랭한 문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가슴속 깊은 곳부터 서서히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7일 동안이나 연락 두절이었는데 눈치도 못 챘고 걱정도 안 했단 말인가?’
지난 3년간의 결혼 생활은 그저 한바탕 웃음거리였던 것 같았다.
한참 후, 그녀는 천천히 한 줄의 글자를 써 내려갔다.
[나도 다쳐서 갓 퇴원했어요.]
곧,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진태경이 쏘아붙였다.
[헛수작 마. 불쌍한 척하면서 존재감 드러내는 꼴 볼 기분 아니니까.]
곧바로 6억이라는 거액이 찍힌 송금 내역이 떴다.
강지연은 가슴 한복판에 묵직한 쇠망치가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아주 강렬한 타격은 아니었지만, 이미 꽁꽁 얼어붙은 심장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기에는 충분했다.
진태경의 눈에 강지연은 돈에 눈이 멀어 진씨 가문에 시집온 속물, 과거 우연히 그의 할머니를 구한 것을 빌미로 결혼을 강요한 뻔뻔한 여자, 딱 그 정도였다.
그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 속셈은 지극히 단순했다.
강지연과 그의 형수, 즉 그가 그토록 사랑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첫사랑 임다은이 둘 다 희귀한 RH 혈액형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임다은은 선천성 혈액 응고 장애를 앓고 있어 정기적으로 수혈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임다은의 이동식 혈액 저장고로 삼는 조건으로 결혼에 응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는 그 사람과 얼굴이 조금 닮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닮지 않았다.
그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진심을 발밑에 두고 함부로 짓밟지 않았을 것이고 그처럼 냉담하고 무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강지연은 그 돈을 받지 않았다.
삼십 분 후, 그녀는 임다은이 있는 진도 그룹 산하의 사립 병원으로 향했다.
VIP 병실 밖에서 진태경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눈썹 사이로 짙은 걱정을 드러냈다.
그는 정말 그 사람과 많이 닮았다. 똑같이 섬세한 이목구비, 말끔한 정장이 돋보이는 훤칠한 키, 고고한 분위기, 높은 콧대와 얄팍한 입술까지 마치 정교하게 조각된 석고상 같았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그 사람은 눈매가 온화했지만 진태경은 냉담하고 고고하며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강지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동시에 자신이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첫사랑을 걱정할 때만 그 사람과 가장 닮아 보였다.
그녀는 지난 3년간 그 그림자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그에게 헌신적으로 모든 것을 맞춰주었지만, 결국 상처투성이만 남았다.
진태경은 발소리를 듣고 뒤돌아보았고 검은 눈동자는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며칠 동안 집에 없었던 거야? 도대체 어디 갔었어?”
진태경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교통사고 당시 강지연의 손목도 심하게 다쳤었기에 그의 강압적인 손길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놔요!”
강지연은 진태경을 뿌리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 대표님, 우리 결혼 계약에 따라 저는 당신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았으니 마찬가지로 제가 어디에 가든 당신이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어요.”
진태경은 즉시 미간을 찌푸렸다.
강지연은 늘 그에게 순종적이고 비위를 맞추려 애썼는데 갑자기 이런 태도로 나오니 묘하게 불쾌했던 것이다.
그는 따져 묻고 싶었지만 병실에 있는 임다은을 생각하며 짜증을 억눌렀다.
“네 행선지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아. 돈은 이미 보냈으니 당장 가서 다은에게 수혈해.”
강지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마치 자신의 첫사랑을 위해 피를 뽑아 주는 게 강지연의 당연한 의무라는 듯, 너무나도 당연한 말투였다.
평소 같았으면 또 며칠 동안 가슴앓이를 했을 테지만 이번 교통사고를 겪으며 그녀는 깨달았다.
아무리 애써도 녹지 않는 쇠붙이 같은 마음은 더 이상 붙잡고 있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진 대표님, 돈은 필요 없어요. 수혈은 해 드릴 수 있지만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진태경은 굳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강지연은 그의 발치에 이혼 서류를 툭 던졌다.
“이혼해요. 나도 이제 지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