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결국 그는 그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진태경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물었다.
“무슨 뜻이야?!”
강지연은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
“들은 대로예요. 어차피 진 대표님도 저와 결혼할 마음은 없었잖아요. 그저 할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죠. 이제 저는 깨달았고 더 이상 당신한테 얽매이고 싶지도 않아요. 할머니께는 제가 알아서 설명해 드릴게요. 시간 내셔서 이혼 합의서 좀 작성해 주세요.”
진태경의 손등에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강지연이 정말 이혼을 원한다고? 어떻게 감히!’
결혼한 지 벌써 3년이나 되었고 비록 그녀에게 애정은 없었을지언정 이혼할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난 3년간 나에게 온갖 아양을 떨던 그녀가 어째서 갑자기 이혼을 하겠다는 걸까?’
차갑게 식어 버린 그녀의 표정을 보며 진태경은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비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매달려 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밀당이라도 하겠다는 심산이야?”
그는 손을 뻗어 강지연의 턱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지금 네 얄팍한 수작에 놀아줄 시간 없어. 당장 들어가서 다은에게 수혈해! 만약 다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넌 절대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그의 손아귀 힘은 어찌나 강한지 그녀는 뼈가 으스러질 듯했다.
강지연은 속으로 냉소를 삼켰다.
역시나 이혼 따위는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진태경은 그녀가 결코 그를 떠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가소로운 건 바로 자신이었다. 한때 죄책감 때문에 그에게 진심 어린 마음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니...
강지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지나쳐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임다은은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로 베개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의 가냘픈 손가락에는 베인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강지연을 발견한 그녀는 가련한 눈망울을 깜빡이며 말했다.
“지연 씨,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됐네요. 정말 미안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감미로웠지만 어딘가 모르게 교묘한 도발이 숨어 있었다.
“요즘 기분도 울적하고 해서 태경이가 계속 곁을 지켜줬어요. 고마운 마음에 저녁이라도 직접 해 주려고 했는데, 칼질하다가 그만 손을 베어 버렸지 뭐예요. 괜히 태경이만 또 부산스럽게 만들었네요.”
강지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겠지만 이제 진태경은 그녀와 아무런 상관없는 남남일 뿐이었다.
“괜찮아요. 다 가족인데 뭘 그렇게 예의를 차리세요.”
강지연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형님 혼자 청상과부로 지내는 것도 안쓰러운데 태경 씨가 잘 챙겨 드려야죠. 바깥에서 헛소문이 떠돌아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태경 씨가 알아서 싹 다 정리해 줄 거예요.”
그녀의 눈에 비웃음이 스쳤다.
“아무래도 시숙이랑 형수 사이가 수상하면 할머니께서도 가만히 안 계시겠죠. 당장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실지도 모르는데.”
임다은의 안색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녀가 진태경의 형 진태민과 결혼한 건, 진태경이 둘째 아들이라 가업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태민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 버릴 줄이야.
이제 와서 진태경이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할머니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강지연 혼자 팔자 좋게 웃고 다니는 꼴은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임다은은 슬쩍 문 쪽을 흘겨보더니 갑자기 이를 악물고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억지로 뽑아 버렸다. 붉은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지연 씨, 오해하지 말아요. 태경이는 그냥 내가 안쓰러워서 곁에 있어 준 것뿐이에요... 나한테 화내는 건 괜찮지만, 태경이까지 나쁜 사람 만들지는 말아 줘요.”
강지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문이 활짝 열리더니 진태경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임다은의 손에 흥건한 피를 보자 그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성큼 다가와 강지연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강지연, 다은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갑작스럽게 손목을 잡아채는 통에, 강지연은 속수무책으로 휘청거렸고 채 낫지 않은 다리에 찌릿한 통증이 퍼져 나가더니 균형을 잃고 탁자 모서리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은 삽시에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진태경은 순간 움찔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세게 잡아당긴 것도 아닌데 강지연이 저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옆에 있던 임다은이 가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경아, 지연 씨 너무 나무라지 마. 아까 내가 요즘 네가 나 아픈 거 때문에 계속 곁에 있어 준 것뿐이니 섭섭해하지 말라고 했더니 질투가 났나 봐... 나는 괜찮아. 지연 씨는 네 와이프니까 내가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정말 힘들면, 지연 씨 먼저 데리고 돌아가. 괜히 나 때문에 두 사람 싸우지 말고...”
진태경의 눈빛에 스쳤던 희미한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금 그들의 대화 내용을 일부 듣긴 했지만, 먼저 시비를 건 건 강지연이었다.
임다은은 그의 오랜 소꿉친구이자, 이제는 고인이 된 형의 아내였다. 그는 형을 대신해 그녀를 잘 챙기겠다고 다짐했지만, 강지연은 그런 약속조차 못마땅해했다. 왜 이렇게 속이 좁은 걸까.
그는 차가운 얼굴로 강지연을 쏘아보며 명령했다.
“당장 사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