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그녀를 뭐로 보고
강지연은 생각에 잠기다 말고 망설임 없이 그의 번호를 스팸 차단 목록에 추가해 버렸다.
그러자 차승준이 갑자기 그녀에게 윙크를 하며 능글맞게 물었다.
“누나, 이제 자유의 몸이 되셨으니 내가 화끈하게 스트레스 풀어줄까?”
강지연은 잠시 멍해지며 손사래를 쳤다.
“됐어,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차승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이번에 새로 바를 하나 오픈했는데 그냥 힘 좀 실어준다 생각하고 가주라. 우리 마지막으로 술잔을 기울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잖아. 누나의 찬란한 새 출발을 축하하는 의미로, 딱 한 잔만 어때?”
강지연은 완강하게 거절했지만 그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차승준은 번쩍거리는 빨간색 페라리로 바꿔 타고 그녀를 데리고 시내 중심가에 새롭게 문을 연 루나 바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차승준이 엄청난 공을 들였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바 안의 직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뛰어난 외모를 자랑했고 인테리어 또한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두 사람은 곧장 바에서 가장 프라이빗한 룸을 잡고 값비싼 술들을 잔뜩 주문했다.
그저 술이나 홀짝이며 울적한 기분을 달래려 했을 뿐인데 갑자기 차승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가더니 꽃미남들을 한 무더기 이끌고 돌아왔다.
우람한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복근 훈남, 금발 머리를 찰랑거리는 귀여운 연하남, 젠틀한 미소 뒤에 음흉함을 감춘 듯한 안경 쓴 남자, 심지어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는 소년 같은 남자애까지, 딱 봐도 이제 갓 성인이 된 듯한 풋풋함이 느껴졌다.
강지연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야, 너 진짜 미쳤냐?”
“누나, 나랑 둘이서 심심하게 마시는 것보단, 이렇게 여럿이서 왁자지껄하게 마시는 게 훨씬 낫잖아.”
차승준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들은 우리 가게에서 제일 예쁘고 인기 많은 동생들이야. 누나 맘에 드는 친구로 골라서 실컷 즐겨. 오늘은 내가 쏜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형도 누나가 평생 우울하게 지내는 건 원치 않을 거야. 그 쓰레기 같은 놈한테서 벗어났으니 이제부턴 행복만 좇아야지. 자, 새로운 시작을 향해 첫발을 내디뎌 보자고!”
그녀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차승준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얄미운 녀석!’
강지연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이들을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었지만 흰 머리 남자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누님은 저희가 더럽다고 생각하세요?”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을 보니 마치 억울한 누명을 쓴 듯한 표정이었다.
남자 여우가 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래. 그냥 술이나 마시는 건데 뭐.’
그녀는 체념한 듯 술잔을 들어 목으로 털어 넣었다. 몇 잔 마시니 술기운이 오르면서 신기하게도 울적했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어린 남자들은 하나같이 살갑고 애교가 넘쳤다. 입만 열면 누나, 누나 하며 넉살 좋게 구는 통에, 도저히 매몰차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특히 하얀 머리 소년은 눈치도 빠르고 살뜰하게 그녀를 챙겼다. 술도 대신 받아 마셔 주고 과일도 손수 잘라 입에 넣어 주며 그동안 텅 비어 있던 그녀의 감정을 따뜻하게 채워 주었다.
다시 한번 곱씹어 생각해보니 그녀는 돈도 많고 얼굴도 예쁜데, 왜 그동안 그 모든 것을 가짜 사랑에 쏟아부으며 스스로를 괴롭혔던 걸까...
정말이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강지연은 완전히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동생들과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룸 문이 갑자기 쾅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렸다.
키가 훤칠한 남자가 온몸에서 싸늘한 냉기를 뿜으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술기운에 살짝 취기가 오른 강지연은 몽롱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남자를 힐끗 쳐다보더니,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 지원이 같은데... 아니, 저 싸늘하게 굳은 표정은 진태경이지.’
“넌... 새로 온 애냐?”
그녀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걸어가 그의 넥타이를 잡아챘다.
“얼굴 굳히고 있지 말고 웃어 봐. 웃으면 내가 팁 줄게.”
진태경의 얼굴은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고 그녀의 손목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웃으라고? 강지연... 너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진 거야?! 아까는 차씨 가문 망나니랑 시시덕거리더니, 이제는 이런 퇴폐적인 곳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도대체 이런 배짱은 어디서 난 거야!”
손목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에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본 강지연은 그제야 자신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진태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어졌다.
“내가 뭘 하든 당신과 무슨 상관이에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삶에 간섭하는 건데? 우리 곧 이혼하잖아요.”
“아직 이혼 안 했어!”
진태경은 이를 악물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하루라도 내 마누라이면 나는 널 간섭할 자격이 있어!”
강지연은 그의 꼴사나운 모습이 그저 웃길 뿐이었다.
“진태경 씨, 당신과 댁 형수님 일에 나는 단 한 번도 간섭한 적 없어요. 혼인 조항에도 명확히 나와 있듯이 서로 사생활은 묻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녀도 또박또박 받아쳤다.
“임다은 씨는 아직도 병원 문 앞에 있는 거 아니에요? 제발 썩 꺼져 줄래요? 당신 얼굴만 봐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기분만 더러워지니까.”
진태경은 쉬지 않고 쫑알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목구멍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는 그녀에게 쏜살같이 다가가 입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입술이 닿기 직전,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고는 그녀를 번쩍 들어 어깨에 둘러멨다.
“안 나가겠다고? 네 맘대로 되는 일은 없어!”
강지연은 그의 등을 끊임없이 두드렸다.
“이거 놔!”
진태경은 그녀의 끊임없는 저항에 짜증이 폭발했고 그냥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빛 가득 혐오감을 드러냈다.
“적당히 좀 해!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결국 내 관심을 끌고 싶어서잖아. 그래, 네 소원대로 내가 직접 찾아와 줬으니 이제 뭘 더 바라는 거야?”
강지연은 땅바닥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켜,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가 정말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제멋대로인 남자가 있을 수 있을까.’
예전에는 저 얼굴에 홀려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옹호했으며 심지어 저런 몰상식한 소유욕마저 깊은 애정의 표현이라고 멋대로 해석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저 콩깍지가 너무 두껍게 씌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서 여유로운 태도로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자뻑하지 말아요. 예전에는 내가 눈이 삐었었나 봐요. 당신 얼굴이 잘생겨 보였다니. 지금은 확실히 알겠어요. 당신은 그 잘난 얼굴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진태경은 그녀의 눈빛에 담긴 노골적인 혐오감에 가슴 깊이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그래, 강지연이 먼저 이혼을 입에 올리면서부터, 차씨 집안 아들이 나타나면서부터였어.’
그의 주변을 감싸는 공기가 점점 더 무겁게 짓눌러 왔다.
바로 그순간, 굳게 다문 입술로 성큼 다가온 진태경은 강지연을 벽에 꼼짝 못 하게 밀어붙였다.
차갑고 딱딱한 벽의 감촉에 강지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태경은 그녀가 자신의 손길을 극도로 혐오한다고 단정 짓고 이유 모를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격렬하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