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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사건의 발단

“관리사무소에서 알립니다. 현재 아파트 내에서 전염병 감염 사례가 발생하여 전 단지를 대상으로 격리 조치가 시행될 예정이오니 입주민 여러분께서는 자택에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순차적으로 점검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안내드립니다...” 나는 대표님 집 앞에 서서 이를 악물고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가운 차림의 남자가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또 뭐야?” 마침 샤워하던 와중에 서류를 전해주러 왔다가 벌써 두 번째로 눈총을 받은 상황이었다. 나는 느슨해진 가운 사이로 언뜻 보이는 탄탄한 가슴을 힐끔거렸다. “관리사무소에서 격리 조치한다고 하네요. 아파트 출입이 금지됐대요.” 대표님은 눈썹을 까딱했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 냈다. “대표님 댁에서 격리 끝날 때까지 지내면 안 될까요?” 관리사무소는 돈독이 오른 게 분명했다. 격리 기간 동안 외부인은 단지 내 호텔에 묵어야만 했다. 1박에 무려 20만 원, 할인도 없다. 대표님의 성격이 아무리 까칠하다고 한들 돈 앞에서 뭔 대수랴? “아니.” 쌀쌀맞은 대답과 함께 문이 서서히 닫혔다. 나는 다급히 손잡이를 잡고 간절하게 외쳤다. “그러시면 안 돼요! 제가 회사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어떻게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수 있죠?” 마침 강아지와 산책 중이던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를 흘깃 쳐다보고 한마디 거들었다. “젊은이, 본인이 저지른 일은 본인이 책임져야지. 아무리 나쁜 남자가 대세라고 하지만 이건 아니야.” 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칠흑처럼 어두운 잘생긴 얼굴이 뚜렷이 보였다. 이웃집 아주머니의 타박이 제법 먹힌 듯 문이 다시 열렸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대표님은 맞은 편에서 서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집에 있는 건 상관없지만.”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공짜는 안 돼. 그동안 도우미가 집안일을 전담했는데 격리 때문에 당분간 못 오니까 오늘부터 인나 씨가 다 해.”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대표님의 표정이 그제야 좀 누그러졌다. 물론 집안일에 익숙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청소 도구들이 완벽하게 갖춰져 무난하게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주방은 예외였다. 대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평소에는 회사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고, 직접 요리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감은 넘쳤다. 요리는 결국 손맛이지 않겠는가? 이것저것 넣고 볶기만 하면 끝일 텐데 뭐가 어렵겠어? 나는 요리 영상을 찾아보고 냉장고에서 각종 식자재를 꺼내 본격적으로 실력 발휘하려고 했다. 가스레인지에서 불꽃이 튀는 순간,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결국 당황한 나머지 점화 손잡이를 반대로 돌렸고, 프라이팬에 두른 기름이 화르르 타올랐다. 불이 붙은 프라이팬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감싸고 뒤로 끌어당겼다. 대표님이었다. 나는 넓은 어깨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대표님은 재빨리 전자레인지를 끄고 옆에 있는 뚜껑을 집어 들어 프라이팬 위에 덮었다. 그러고 나서 나를 돌아보았다. ‘망했네.’ 예전에 비서실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줬는데 단지 왼손으로 컵을 들고 있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 뒤로 비서실은 비상 체제에 돌입했고 하루하루 밥그릇을 지키느라 전전긍긍했다. 이번에도 문서를 전달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어서 결국 나한테 떠넘겼다. 하필이면 대표님의 집을 홀라당 태울 뻔했으니 잘려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와중에 대표님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어깨가 축 늘어졌다. 대표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어, 다음부터 조심해.”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보다 쉽게 용서하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다. 직원들 말처럼 전혀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 아닌데? 나는 감동과 미안함이 뒤섞인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직 손에 익지 않아서 몇 번 해보면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대표님은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주방에서 쫓아내더니 직접 요리하기로 했다. 소매를 걷어 올리는 터프한 모습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헬로키티 앞치마를 둘렀음에도 잘생긴 얼굴 덕분인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갖은 역경 속에서도 화 한 번 안 내고 직접 요리까지 해준 대표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요리 솜씨는 기대 이상이었다. 어찌나 맛있던지 밥 두 공기를 순식간에 비워냈고, 먹으면서 엄지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제야 대표님도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다만 말투만큼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천천히 먹어. 걸신들렸나.” 그날 이후 주방은 대표님의 전용 공간이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3일이 흘렀다. 오늘은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전사 회의 날이며 각 부서 담당자들이 업무 보고를 올리는 형식이었다. 나는 격리 중이라 회사에 나갈 수 없어 상사에게 화상으로 참석하겠다고 미리 말해두었다. 부대표님의 인사말이 이어지는 동안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보통 전사 회의는 임원 보고 중심이라 한낱 사원에게 질문이 들어올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리 부서 순서가 되었을 때 갑자기 지명 당할 줄이야! 실장님의 날이 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근 소문에 따르면 아파트 단지가 격리되었다는 거짓말로 재택근무를 신청한 직원이 있다고 합니다. 확인 결과 사실무근이며, 이는 명백히 악의적인 행위로서 사내 분위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죠. 서인나 씨, 해명 부탁드려요.”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내 화면에 졸린 눈을 한 내 얼굴이 나타났다. 정신이 번쩍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장님, 전 거짓말한 적이 없어요. 현재 제가 있는 아파트 단지가 격리된 건 사실입니다.” “아직도 변명인가요?” 실장님이 버럭 외쳤다. “이미 확인했거든요? 최근에 격리 조치된 아파트는 이품자이 하나뿐이죠. 인나 씨가 거기 사는 건 아니잖아요? 회사에서도 대표님만 거주 중인 걸로 아는데 설마 이웃이라도 되는 거예요?”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턱 막혔다. 일개 월급쟁이가 이품자이 같은 부자 동네에 사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도 부하 직원이 이런 고급 아파트에 산다는 게 믿기지 않을 것이다. 실장님이 냉소를 지으며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려는 순간, 어안이 벙벙한 채 입만 벙긋했다. 나도 넋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화면에 갑자기 나타난 남자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샤워 가운 차림의 대표님이 문틈에 비스듬히 기대고 말했다. “욕실에 둔 속옷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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