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어머니에게 인사드린 뒤, 그녀는 곧장 비자 센터로 향했다.
서류는 이미 다 준비되어 있었고 마지막 단계만 남아 있었다.
빠르게 비자를 발급받은 성나정은 깊은숨을 들이켰다.
적어도 떠날 수 있는 길은 이제 열렸다.
집에 돌아오니 이미 늦은 밤이었다.
성나정은 소리 없이 자신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져온 것도 많지 않았고 가져갈 수 있는 건 더 적었다.
오직 낡은 가족사진 한 장이 그녀에게 남은 위안이었다.
아마 놀란 임수아를 달래기 위해서였을까, 유하준은 3일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 드문 평온 덕분에 성나정은 오래간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성나정은 급박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곧, 유하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수아 이마에 난 상처 감정 결과 나왔어. 영구적으로 흔적이 남을 수도 있어. 성나정, 너는 반드시 수아에게 보상해야 해.”
성나정은 침대 머리에 기대어 그의 말에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
“보상? 지금 남편으로서 요구하는 거야? 아니면 검사로서 알리는 건가?”
수화기 너머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곧이어 더 낮은 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수아는 너를 고의 상해로 고소할 권리가 있어.”
“바라는 바지.”
성나정 입가에 아주 옅지만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임수아 씨의 소환장을 기다릴게. 되도록 네가 직접 재판에 서. 마치 과거 우리 아빠 사건 때처럼. 한 번 더 보고 싶네. 유 검사가 법정에서 어떻게 정의를 위해 가족을 짓밟는지.”
“성나정!”
유하준의 목소리에 결국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스며들었다.
“우리 꼭 이렇게 싸워야만 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잖아.”
성나정의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날카로웠다.
“유하준, 이건 모두 네가 직접 가르친 거야.”
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
심장이 짜릿했다.
하지만 그 뒤로 찾아온 건 더 깊고 무거운 공허와 피로였다.
행복한 마음으로 그와 결혼했을 때 유하준이 결국 다른 사람에게 조금씩 마음을 나눠줄 줄은 몰랐다.
성나정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잠깐 스며든 연약함은 곧 억눌렀다.
이내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워 또다시 짧은 낮잠을 청했다.
해 질 무렵, 문득 느껴지는 누군가의 시선 때문에 깨어난 성나정의 시야에 유하준이 들어왔다.
그는 침대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성나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유하준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임수아 때문에 여러 차례 예외를 범했다.
“그런 짓을 하고도 넌 어떻게 잘 수 있어?”
성나정은 이불을 끌어안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지만 눈빛엔 따뜻함이라곤 없었다.
“원수가 기분이 안 좋다는데 난 당연히 잘 자야지.”
유하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감정을 누르며 휴대폰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화면에는 묘지 CCTV 영상이 떠 있었다.
영상 속, 그녀가 임수아를 눌러 무릎 꿇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편집은 절묘했고 전후 사정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아주 짧은 영상을 본 사람들은 미친 듯이 댓글을 남겼다.
[독한 년, 저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수아 언니 마음 아프겠다, 이런 미친 여자 때문에.]
[유 검사님, 얼른 이혼하세요.]
[성씨 가문 완전히 망했네. 그 아빠에 그 딸이지.]
여론은 계속 확산되었고 일부는 성나정의 신상까지 추적하며 몰아붙였다.
이내 유하준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여론 영향이 커서 사과 기자회견을 잡았어. 내일 넌 공개적으로 수아에게 사과해야 해. 이게 지금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성나정은 고개를 들어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유하준이 다른 여자 때문에 자신에게 법과 여론을 동원하는 모습을.
한때, 그는 똑같이 냉정하고 잔혹한 태도로 성나정의 아버지를 감옥에 보냈다.
성나정이 울며 왜 그랬는지 물었을 때 역시 단호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었다.
“성나정, 잘못했으면 처벌받아야 해. 너에겐 내가 있잖아.”
하지만 유하준은 약속대로 그녀의 든든한 배후가 되어주지 않았다.
“그럼 내가 안 하면 어떡할 건데?”
성나정의 물음에 유하준이 몸을 일으켰다.
“정말 모든 걸 네 손으로 망가뜨려야 속이 후련해?”
성나정은 우스운 이야기라도 들은 듯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유하준, 네가 먼저 그랬잖아. 네가 먼저 내 삶을 완전히 뒤흔들었어.”
유하준의 눈빛은 점점 섬뜩하게 변했다.
몇 초간 그와 대치하던 성나정은 갑자기 옅은 미소를 짓더니 부드럽게 바뀐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아, 사과할게.”
고백현과의 거래 기한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그녀는 어떤 일도 아버지를 데려가는 데 방해가 되게 할 수 없었다.
“단, 조건이 있어.”
성나정은 책상 앞으로 걸어가 서랍에서 이미 준비해둔 서류를 꺼내 유하준의 앞에 내밀었다.
“여기에 서명해.”
유하준은 잠시 멈칫했지만 내용을 보지도 않고 끝에 깔끔하게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이제 됐어?”
성나정은 서류를 집어 들고 평소 꼼꼼하기로 유명한 그가 드물게 내용에 신경 쓰지 않는 걸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가 사과할 때까지 찾아왔겠네.’
그녀는 씁쓸함을 억누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일 약속한 시간에 갈게.”
말을 마친 성나정은 물건을 챙겨 2층으로 향했다.
유하준은 그녀가 또 무슨 일을 벌일까 걱정했지만 다음 날 기자회견장에 성나정이 제시간에 나타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자들은 장비를 단단히 갖추고 대기했다.
성나정은 수수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한 걸음씩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녀는 마이크를 집어 들고 평온하게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마지막으로 시선은 유하준에게 닿았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은 확고했고 이미 예상한 자신의 승리와 성나정의 굴복을 기다리는 듯했다.
곧, 성나정은 마이크 앞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정합니다. 제가 임수아 씨에게 잘못했습니다.”
유하준의 표정이 조금 풀렸지만 이내 들리는 다른 한 마디에 놀란 듯 동공이 급격히 흔들렸다.
그녀는 풍파를 견뎌도 결코 고개 숙이지 않는 나무처럼 씩 웃으며 이런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임수아 씨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