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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송찬미는 룸메이트 오예리가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찬미야, 빨리 일어나 봐. 네 남자친구가 아래서 기다린다고, 나보고 내려오라고 전해달래.” 오예리는 송찬미의 침대 앞에 서서 커튼 안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쿡쿡 찔렀다. 송찬미는 원래도 잠을 깊게 못 자는 편인데, 요 며칠 엄마 병 걱정 때문에 피곤해 죽겠는데도 선잠만 잤다. 오예리가 한번 부르자마자 바로 눈이 떠졌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잠에 취해 웅얼거렸다. “뭐라고?” “심영준이 기숙사 밑에서 너 기다린다고. 나한테 너 좀 불러 달라고 부탁했어.” 송찬미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심영준에 대한 혐오감이 몇 배는 더 커졌다. ‘내가 새벽 네 시 반에 잠든 걸 뻔히 알면서도!’ “나 너무 졸려. 그 사람 신경 쓰지 마.” 송찬미는 말을 마치고 다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막 잠들었어도 벌떡 일어나 그를 만나러 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녀석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없었다. 송찬미는 그대로 정오 11시까지 내리자고 나서야 일어났다. 그녀는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심영준이 놀랍게도 아직도 건물 아래에 있었다. 송찬미는 순식간에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심영준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몇 걸음 만에 다가왔다. “자기야, 어제 오후에 어디 갔었어? 네가 알바하는 카페에 찾아갔는데 휴무라고 하던데.” 송찬미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 어제 몸이 안 좋아서 기숙사에서 하루 종일 잤어.” “몸이 안 좋았다고? 왜? 너무 피곤해서 그래?” 심영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고 겉보기에는 그녀를 무척 아끼는 듯했다. 하지만 송찬미는 다 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심씨 가문의 도련님은 그냥 장난감처럼 그녀를 데리고 노는 것뿐이었다. 그의 진짜 사랑은 허선영이라는 그 여자였다. 지금 그가 헤어지자고 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 아직 실컷 놀지 못해서이고 둘째, 자신을 이용해 그 여자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냥 그들 연애 놀음에 끼어든 들러리일 뿐이었다. 송찬미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감기 기운에 머리가 좀 아파서.” 심영준이 즉시 말했다. “내가 약 사다 줄게.” “됐어, 이미 약 먹어서 많이 괜찮아졌어.” “아, 그래, 알았어.” 심영준이 다가와 송찬미의 손을 잡았다. “자기야, 우리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 송찬미는 치미는 역겨움을 애써 참으며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심영준을 무사히 떨쳐내기 위해 지금은 그의 의심을 사서는 안 됐다. 그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엄마가 나 보러 오셨어. 그래서 오늘 점심은 엄마랑 밖에서 먹기로 했어.” “우리 엄마가 강릉에 오셨어?” 심영준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 나도 같이 갈게, 자기야. 밥은 내가 살게. 어제 막 알바비 받았거든.” 또 우리 엄마란다. 송찬미의 눈에 혐오감이 스쳐 지나갔다. “다음에.” 그녀의 말투는 아무렇지 않았고 눈빛은 차가웠다. “겨울방학 때 인사드리기로 했잖아. 첫인사는 그래도 제대로 격식 차려서 하는 게 맞지.” 심영준의 목소리에 실망한 기색이 어렸다. “하긴, 그렇네.” “자기야, 재미없었어. 하나도 재미없었다고.” 심영준이 갑자기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다음부턴 진짜 이렇게 늦게까지 안 놀게. 나한테 화내지 마.” 그제야 송찬미는 깨달았다. 그는 전화로 그녀가 재밌냐고 물었던 것에 대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그녀가 물었던 것은 그의 ‘가난 코스프레'가 재밌냐는 뜻이었는데. 하지만 심영준은 완전히 착각했다. 그녀가 자신의 늦은 귀가 때문에 화가 나서, 친구 생일 파티가 그렇게 재밌었냐고 비꼬는 줄 알았던 것이다. 송찬미는 그의 착각을 굳이 바로잡지 않고 그의 말에 대충 맞장구쳤다. “응, 화 안 났어.” “진짜?” 심영준이 웃자 그의 눈에 다시 빛이 가득 찼다. 그는 오늘 그녀가 사준 20만이 넘는 흰색 패딩에 그녀가 직접 떠준 흰색 목폴라를 입고 있었다. 심영준은 꽤 잘생긴 편이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피부가 하얘서 가난한 척하던 지난 2년간 물 빠진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도 여전히 돋보였다. 겨울 햇살이 그의 몸 위로 쏟아지자 그는 한층 더 부드러워 보였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그녀에게 그토록 잔인한 짓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송찬미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속은 온갖 생각으로 복잡했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사실 그녀는 너무나 억울했다. ‘왜 나의 진심은 이 자식의 발밑에서 이렇게 짓밟혀야만 하는가? 왜 그는 그렇게 부자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내 돈을 쓰고 내가 매일 죽어라 돈 버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던 걸까? 왜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여자와 그렇게 격렬하게 키스할 수 있었는가?’ “내가 진짜 잘못했어, 제발 나한테 이렇게 차갑게 굴지 마.” 심영준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절대 이렇게 늦게까지 안 놀게. 어디 가든 자기한테 다 보고할게, 응?” “그래.” 송찬미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우리 자기가 최고야.” 심영준이 다가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송찬미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 “사람들 보잖아.” 심영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다음엔 사람 없는 데서 키스하자.” 송찬미가 대답했다. “엄마가 기다리셔. 나 먼저 갈게.” “알았어, 자기야. 난 학교 식당 갈게. 저녁은 같이 먹을까?” “나 알바 가야 해.” 말을 마친 송찬미는 갑자기 한 마디 덧붙였다. “이제 곧 기말고사라 공부할 시간도 빠듯한데... 하지만 요즘 돈이 정말이지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야.” 잠시 말을 멈춘 송찬미는 농담하는 투로 말했다. “네가 갑자기 부자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내가 이렇게 힘들게 쓰리잡은 안 해도 될 텐데.” 심영준의 몸이 순간 굳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의 진심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나중엔 꼭 너 호강시켜 줄게.” 송찬미는 웃었다. ‘확 죽어버려라!’ 그녀는 처음으로 마음속으로 심영준에게 이토록 악독한 저주를 퍼부었다. ... 신승우는 회의를 마치니 마침 퇴근 시간이었고 친구인 박선규가 함께 점심을 먹자고 연락해왔다. 박선규의 회사는 신영 그룹 빌딩 바로 맞은편,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박선규는 심심하면 신승우를 불러내 밥을 먹곤 했다. 레스토랑에서 신승우는 박선규와 사업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무심코 대각선 맞은편 테이블의 남녀를 보고는 시선이 그 자리에 멈췄다. 심영준의 맞은편에는 굵은 웨이브 머리를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송찬미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거리가 멀지 않아 신승우는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여자가 물었다. “학교에서 사귀는 여자친구 있다며?” 심영준은 신승우 쪽을 향해 앉아 있었기에 그 각도에서는 그의 입가에 걸린 능글맞은 미소가 선명하게 보였다. 심영준이 대답했다. “어. 너도 외국에서 남자친구 사귀었잖아?” “귀국하기 전에 다 정리했어.” 여자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 송찬미라는 애랑은 언제 헤어질 건데?” 신승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질리면 헤어지겠지.” 심영준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였다. “그런데 거지 코스프레, 그거 진짜 재밌어. 적어도 걔가 돈 때문에 나랑 사귀는 건 아니라는 건 확실하잖아.” 여자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네 말 들어보니 아직 헤어질 생각은 없나 보네?” 심영준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렸고 눈빛은 애매모호했다. “왜? 질투 나?”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걱정 마, 자기야. 송찬미는 그냥 잠깐 가지고 노는 거야. 실컷 놀고 나면 당연히 네 곁으로 돌아갈게.” “승우야?” 신승우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본 박선규가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뭘 그렇게 봐?” 신승우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입술은 일자로 굳게 닫혀 있었고 표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왜 그래?” 박선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누가 시비 걸었냐? 표정이 왜 그따위야?” 신승우는 차갑게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밥이나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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