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옷 배달 왔나 봐요. 제가 나가 볼게요.”
송찬미는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 긴 숨을 내뱉었다. 물에 빠져 죽기 직전에 겨우 살아난 기분이었다.
방금 신승우가 뿜어내는 압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결혼하자는 말을 뱉었을 때, 그녀는 긴장해서 손발이 떨려 어쩔 줄을 몰랐다.
신승우는 말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송찬미는 벌떡 일어나 후다닥 문으로 가 문을 열었다.
문밖의 직원은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쇼핑백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사이즈에 맞춰 준비한 옷입니다.”
“고맙습니다.”
송찬미는 옷을 받아 들고 문을 닫았다.
거실을 지나는데 소파에는 이미 신승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통유리창 앞에 서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실내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 고요한 실루엣으로 그려졌다.
창밖, 도시의 번잡함과 화려함은 밤의 장막에 부드럽게 감싸여 있었고 현란한 네온 불빛은 창에 반사되어 남자의 형상을 더욱 깊고 신비롭게 만들었다.
송찬미는 그의 등 뒤에 서서 잠시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파도처럼 일렁이며 심장의 고동이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오래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은밀한 감정이 이 순간 둑이 무너지듯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송찬미는 황급히 그 낯선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쇼핑백 안에는 작은 주머니가 두 개 들어 있었다. 송찬미는 작은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든 속옷을 꺼냈다.
옷에서는 은은한 세탁 세제 향이 났고 손에 쥐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막 세탁해서 건조한 뒤 바로 가져온 모양이었다.
다른 작은 주머니에는 흰색 실크 슬립 원피스가 들어 있었다. 비록 겨울이었지만 실내는 난방이 잘되어 있어 이 잠옷을 입어도 춥지 않을 터였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나니 목이 말랐다.
침실에는 물이 없었고 그녀는 아까 거실 탁자 위에 생수 몇 병이 놓여 있는 것을 봤다.
송찬미가 침실 문을 열고 두어 걸음 걸어 나갔을 때, 갑자기 맞은편 문이 열렸다.
신승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송찬미가 거실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그의 시선이 잠시 멈추더니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미안, 자는 줄 알았어.”
송찬미가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저 물 마시러 나왔어요.”
“어.”
신승우는 더는 말하지 않고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맞은편 문이 닫히자 송찬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두어 걸음 걷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홱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입고 있는 실크 슬립 원피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 전체가 눈에 띄게 확 붉어지더니 피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잠옷은 얇은 한 겹이라 가슴 부분이 어렴풋이 비쳤던 것이다.
‘그 사람... 못 봤겠지?’
...
침대에 누우니 벌써 아침 일곱 시였다.
이 시간이면 몹시 졸려야 마땅했지만, 송찬미는 침대에 누워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엄마의 병을 생각하자 그녀는 또다시 참지 못하고 울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삶은 늘 엄마와 단둘이 서로를 보듬고 의지하며 살아온 날들이었다.
유치원에 다닐 때, 다른 아이들에게는 모두 아빠가 있는 것을 보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아빠는 어디 갔냐고 물었지만 엄마의 눈에는 어린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 아빠는 없어. 네 아빠는 진작에 죽었어.”
그때의 송찬미는 너무 어려서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 후로 유치원 친구들이 아빠에 대해 물으면, 그녀는 아빠가 진작에 죽었다고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어떤 아이들은 아빠가 없다며 놀려댔고 그럴 때면 유치원 선생님만이 안쓰럽게 그녀를 안아 올리고 사탕을 주며 달래주었다.
엄마는 언제나 무척 강인한 여자로 혼자서 꿋꿋이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송찬미는 초등학교 때 엄마가 아침 식사를 파는 노점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장사가 얼마나 잘 되었는지 옆집 노점상 주인의 질투를 살 정도였다.
당시 그들은 허름한 아파트에 살았는데 아침 식사 카트를 집 안으로 들일 수가 없어 매일 장사를 마치면 골목에 세워두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사를 나가려는데 장사를 나가려던 엄마는 카트 바퀴 하나가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엄마는 당황하는 대신, 말없이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그녀는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
그 후 중학교 3학년 때, 엄마는 노점으로 모은 돈으로 작은 식당을 열었다. 아침 식사뿐만 아니라 간단한 백반도 팔았다.
겨우 테이블 네 개를 놓을 수 있는 아주 작은 가게였지만 손님이 많아서 매일 장사가 잘됐다. 그녀는 주말이면 가게에 가서 일을 도우며 숙제를 하곤 했다.
송찬미는 그때 자주 밥을 먹으러 오던 한 손님이 항상 무언가를 가져왔던 것을 기억한다. 때로는 신선한 과일을, 때로는 그녀가 좋아하는 간식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때 그녀는 이미 열다섯 살이었고 학교에서 친구들이 연애하는 것을 보며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에 대해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아저씨가 엄마에게 호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처음에 그녀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녀는 모르는 남자가 자신의 아빠가 되는 것도, 그 남자가 엄마를 빼앗아 가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그 아저씨가 가게에 올 때마다 송찬미는 쌀쌀맞게 굴었다.
나중에 엄마가 그 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여름방학, 송찬미는 친구 친척이 하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알바를 해서 140만 원을 벌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금값이 비싸지 않아서 송찬미는 30만으로 엄마에게 금목걸이를 사드렸다. 장미꽃 펜던트가 달린 아주 예쁜 목걸이였다.
엄마는 선물을 받고 입으로는 쓸데없이 돈 쓴다고 타박했지만, 실제로는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학에 가기 전날 밤, 송찬미는 엄마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엄마 얼굴의 주름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엄마, 이제는 마음 편히 좋은 분 만나보세요. 몇 년 동안 혼자 너무 고생했잖아요. 중학교 때는 내가 너무 철이 없었어요. 그때 그 아저씨 사실 정말 좋은 분이었는데, 다 나 때문에...”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찬미야, 네 탓 아니야. 엄마는 그냥 남자들한테 질려서 재혼하기 싫은 거야. 혼자인 게 편하고 좋아.”
대학 입학 후 수년간, 송찬미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매년 장학금을 받았으며 각종 대회에서 수상했다.
그 상금의 일부는 저축했고 나머지는 엄마에게 화장품이나 금반지를 사드리는 데 썼다.
비록 쓰레기 같은 심영준과 연애하며 돈을 꽤 쓰긴 했으나 그 돈은 모두 그녀가 알바로 번 돈이었다.
그녀는 엄마의 생활비를 한 푼도 받지 않았으며 월 40만 원의 생활비 역시 아르바이트와 상금으로 해결했다.
날이 환하게 밝았다. 송찬미는 몸을 뒤척이다가 베개가 한가득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엄마의 병을 생각하니 송찬미의 마음은 바늘로 찌르는 듯 촘촘하게 아파왔다.
그녀는 엄마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2년 넘게 만났던 심영준에 대한 미련은 그리 힘들이지 않고 떨쳐낼 수 있는 듯했다.
졸음이 몰려오자 송찬미는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몽롱한 와중에 휴대폰 화면이 한번 반짝였다.
심영준에게서 온 문자였다.
화면에 대화 내용이 떴다.
[자기야, 새벽에 전화했었네, 무슨 일이야? 나 자고 있어서 못 받았어.]
송찬미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뒤집어 베개 옆에 두고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