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방세린은 하태원이 그냥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음 날 정말로 일을 미루고 이제 막 일어난 방세린을 기다리며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유니월드에 도착했다. 하태원은 오늘 양복 대신 편안한 캐주얼룩을 입었고 어깨에 방세린의 가방까지 메고 있었다. 얼핏 보면 다른 다정한 커플과 다를 바 없었다.
그가 사 온 버터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방세린은 고개를 들자마자 그가 쳐다보고 있는 걸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태원은 예술가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그리듯 그녀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휴지로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고양이 같아.”
그때 멀리서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세린과 하태원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한 소녀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죄송해요.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려서요.”
그러고는 사진을 건네주었다.
사진 속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감싸 쥔 채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방세린은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마음은 입을 막아도 눈으로 튀어나오니 절대 숨길 수 없다는 말 말이다.
하지만 하태원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빛을 그 누구보다 진짜처럼 연기했다.
“두 분 꼭 행복하세요.”
소녀는 이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하태원은 사진을 방세린의 가방에 넣으며 당부했다.
“잘 보관해야 해. 알았지? 80살이 되면 같이 꺼내 보자.”
‘80살? 하지만 태원 씨가 80살이 되었을 때 태원 씨 곁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닐 텐데.’
방세린은 웃고 싶었지만 입꼬리가 말을 듣지 않는 듯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귀신의 집은 방세린이 오랫동안 기대했던 코스였다. 하태원은 그녀가 무서워할까 봐 먼저 들어가서 한 바퀴 돌겠다고 했다.
그런데 밖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하태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찾아 나서려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는데 송주아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사진 속 장소는 그녀와 하태원의 침실이었다. 와인색 실크 잠옷을 입은 여자가 훤칠한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남자의 탄탄한 팔뚝과 여자의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태원 오빠가 여기서 하고 싶다고 했는데 여기엔 네 냄새가 배어 역겨워서 싫다고 했어.]
[오빠가 언제 너한테 질려서 쫓아낼지 맞혀볼래?]
[네가 떠나면 이 방을 깨끗하게 소독해야겠어.]
순간 속이 울렁거린 방세린은 쓰레기통 옆으로 달려가 토를 했다. 가방에서 휴지를 찾던 중 하태원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을 꺼내 한번 쳐다보고는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유니월드를 떠났다.
저녁 무렵 하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세린아, 미안해. 일부러 널 혼자 두고 간 게 아니야. 주주들이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갈 수밖에 없었어. 집에는 잘 들어갔어?”
“응. 집에 왔어.”
방세린의 대답에 하태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갔으면 됐어. 네가 혼자 밖에서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걱정했어.”
방세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끊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의 앞에 나타난 건 그녀의 시신이었을 것이다.
이사 센터 직원들이 줄지어 들어와 그녀가 정리해놓은 짐을 하나씩 옮겼다.
운조 힐스를 떠나기 전 방세린은 드레스룸에 들렀다.
드레스룸에 지난 2년 동안 하태원이 준 선물들이 가득했다. 옷부터 신발, 가방, 액세서리까지 크고 작은 물건들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태원은 그녀에게 항상 씀씀이가 후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떤 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입술을 비틀어 조롱하듯 웃고는 망설임 없이 떠났다.
하태원은 깨어나자마자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왼손을 뻗어 옆에 있는 사람을 끌어안았다.
방세린의 머리카락이 윤기가 흐르고 매우 아름다웠다. 그녀의 머리 냄새를 맡으면 막 깨어났을 때의 피로감을 씻어낼 수 있는 듯했다.
하지만 오늘은 옆에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린이가 어젯밤에 집에 안 들어왔나?’
순간 잠기운이 확 사라졌다.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가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옷장 왼쪽에 다림질이 잘 된 그의 양복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오른쪽에 원래 방세린의 물건이 가득했었는데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서둘러 다른 쪽 문을 열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상황이지?’
하태원은 허리에 손을 얹고 방세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연결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몇 번 더 걸었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방세린이 그의 연락처를 차단한 것이었다.
알 수 없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방세린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어제 그냥 약속을 펑크낸 것뿐이잖아. 전화해서 해명도 했고. 전에는 참 사리 분별이 분명한 사람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변했지?’
그때 무서운 생각이 하태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내가 어제 주아를 만나러 간 걸 세린이가 알았나?’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이미 주변 사람들한테 언질을 줘서 나한테 찍힐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세린이한테 고자질할 사람이 없을 텐데.’
하태원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옷장 문을 쾅 닫았다.
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태원의 두 눈이 반짝 빛나더니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세...”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도우미 안정희였다.
“아주머니?”
하태원은 딱히 뭐라 하지 않았지만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하태원의 심기를 건드린 것도 모르고 공손하게 말했다.
“대표님, 아침 식사 다 준비했어요.”
하태원이 콧대를 문지르며 물었다.
“세린이는요?”
안정희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어제 방세린이 돌아오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이사 센터를 불러 짐을 챙기고 떠났다는 사실을 감히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뭔가 알아차린 듯 손을 내저었다.
“우선 내가 입을 옷 좀 가져다줘요.”
안정희가 코디에 서툴렀던 터라 커프스단추와 넥타이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태원이 거울을 보며 금방 맨 넥타이를 풀었다.
“짙은 남색 스트라이프 넥타이를 가져와요.”
안정희는 아무 말 없이 드레스룸에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 빈손으로 나왔다.
“대표님, 대표님의 물건은 평소에 세린 씨가 관리하셔서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했어요.”
“이만 나가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