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하태원은 오늘 아침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셔츠 단추를 잘못 끼운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 말이다.
식탁 앞에 다가가자 아침부터 잔뜩 찌푸렸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왜 국이 없어요?”
방세린은 늘 하태원의 과도한 업무량을 걱정하면서 몸보신을 위해 매일 다른 국을 끓여주곤 했다.
전에는 그런 그녀를 유난스럽다고 웃어넘겼지만 막상 상에 국이 없으니 오히려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는 안정희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하태원은 깨달았다. 방세린이 없으니 국이 있을 리 없었다.
“대표님, 식사 안 하십니까?”
“네. 생각 없어요.”
하태원은 차를 몰고 곧장 방세린의 학교로 향했다.
방세린이 책을 안은 채 강의동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옆에 위준우도 함께 있었다.
아침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쏟아졌다. 그녀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위준우와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세린이 지원한 학교가 위준우의 모교라 물어볼 사항이 있어서 특별히 찾아온 것이었다.
“고마워요, 선배.”
위준우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고맙긴. 또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위준우의 손이 거슬렸던 하태원은 실눈을 뜬 채 방세린을 불렀다.
“방세린.”
방세린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하태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태원은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다.
지난번 일로 교훈을 얻은 방세린은 하태원이 사람들 앞에서 위준우와 충돌할까 봐 서둘러 말했다.
“선배, 난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위준우의 시선이 뒤에 서 있는 하태원에게 향했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세린이 옆을 지나가자 하태원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태원 씨,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아파.”
하태원이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오가는 많은 학생들의 시선이 전부 그들에게 쏠렸다.
방세린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여기서 이러지 마. 사람들이 보잖아.”
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하태원의 가슴속에 하루 종일 맴돌던 분노도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차에 탄 후 하태원이 따지듯이 물었다.
“집은 왜 갑자기 나간 건데?”
묻자마자 조금 전 나타난 위준우가 떠올라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위준우가 너한테 무슨 말이라도 했어?”
방세린은 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태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일은 이미 설명했잖아. 일부러 널 버리고 간 게 아니라고. 언제부터 이렇게 철이 없었어?”
방세린은 그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았다.
“졸업 시즌이라 학교에 일이 많거든. 운조 힐스에서 지내는 게 불편해서 나왔어.”
이건 사실이었다. 하태원에게서 떠날 계획인 건 맞지만 졸업 후 그가 그녀를 찾을 수 없을 때 떠나고 싶었다.
하태원은 의심이 가시지 않아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배터리가 방전되어 꺼져 있었다.
그의 행동에 방세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제야 비로소 안심한 하태원은 갑자기 방세린을 품에 끌어안았다.
“네가 날 떠나려는 줄 알았잖아.”
그의 말투에 그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방세린은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품 안에 새길 듯이 세게 끌어안았지만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와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콘솔 위에 놓인 렌즈 케이스에 머물렀다. 하태원의 시력이 문제없었기에 렌즈 케이스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자명했다.
갑자기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쥔 듯한 통증이 밀려와 하태원을 밀어냈다.
“여기 주차하면 안 돼. 빨리 가자.”
“그래.”
하태원은 무심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방세린의 눈빛이 한없이 냉랭하고 차가웠던 것이었다.
‘예전에 날 바라볼 땐 항상 빛이 났고 밝았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렸지?’
하태원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오늘 하루 종일 너무 지쳐서 생긴 착각일 뿐이라고 여겼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태원은 방세린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손가락을 억지로 끼워 넣으면서 깍지를 꼈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를 감지하고 고개를 숙였는데 가운뎃손가락에 꼈던 반지가 없었다. 하태원이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
“내가 준 반지는?”
‘그 반지는 내가 준 첫 번째 선물이라 항상 끼고 다녔었는데 어디 갔지?’
방세린이 가운뎃손가락을 가볍게 문지르며 덤덤하게 말했다.
“잃어버렸어.”
“어쩌다가? 어디서 잃어버렸는데? 다시 찾을 수 있어?”
“글쎄.”
방세린이 준 상자를 하태원이 열어본다면 그 반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하태원은 그녀의 눈에 스친 슬픔을 보고 반지를 잃어버려 속상해하는 줄 알고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하루 종일 이상했던 기분이 그냥 착각이었어. 세린이는 여전히 예전처럼 날 아끼고 사랑하고 있어.’
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쥐더니 입술에 가져다 댄 채 속삭였다.
“잃어버렸으면 어쩔 수 없지. 괜찮아. 내가 다시 사줄게, 응?”
하태원은 말한 대로 다음 날 바로 새 반지를 사주었다.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였는데 눈부시게 빛났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직접 반지를 끼워주었다.
방세린은 눈앞의 다정한 남자를 보면서 그가 결혼식에서 다른 여자에게 반지를 끼워주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에게 반지를 사줄 수는 있지만 그녀를 그의 신부로 맞이할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하태원이 그녀의 코를 톡 쳤다.
“고작 이 정도로 감동해서 울어? 쯧쯧. 이번에는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돼. 알았지?”
방세린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앞에 있는 그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하지만 태원 씨, 태원 씨는 이미 날 잃어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