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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주말, 하태원은 방세린과 함께 소꿉친구인 주성태의 생일 파티에 갔다. 방세린이 손에 낀 사파이어 반지를 보자마자 주성태가 입을 쩍 벌리며 괴성을 질렀다. “이 반지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수십억 원에 낙찰받았다고 들었는데.” 주성태가 팔꿈치로 하태원을 쿡 찔렀다. “그 미스터리한 구매자가 우리 태원 형이었구나. 완전 거금을 쏟아부었네.” 하태원은 그를 무시하고 두 손으로 방세린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우리 세린이가 기뻐한다면 돈이 얼마가 들든 아깝지 않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룸 안의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미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물 쓰듯이 한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어쩐지 두 사람의 사이가 엄청 좋더라니. 한 수 배웠어.” 방세린은 환호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봤다. 그날 밤 하태원의 약혼을 축하했던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지만 마음속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파티 도중 누군가 하태원에게 술을 따르려 하자 하태원은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오늘 밤은 안 돼. 세린이가 내가 술 마시는 걸 싫어하거든.” 그러고는 포크로 복숭아를 찍어 방세린에게 먹여주었다. “너 복숭아를 제일 좋아하잖아. 널 위해 특별히 주문했어.” 술을 따르려던 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하태원을 쳐다봤다. “하 대표, 나 닭살 돋은 것 좀 봐.” 하태원이 웃으며 말했다. “저리 가 있어.” 그때 하태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집어 들자마자 얼굴의 미소가 확 굳어지더니 돌아서서 방세린을 껴안았다. “세린이 너 평소 일찍 자잖아. 얘네들 오늘 밤을 새울 기세인데 기사님을 불러 집에 데려다줄까?” 시종일관 방세린을 배려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방세린은 그의 눈을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태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달콤하고 과즙이 풍부한 복숭아를 씹던 방세린은 갑자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 하태원이 휴대폰을 볼 때 무심코 화면을 힐끗 봤는데 송주아가 그에게 보낸 메시지 화면이었다. [혼자 집에서 너무 심심해. 성태 씨는 어디서 생일 파티를 해? 나도 놀러 가고 싶어.] 하태원이 답장을 보냈다. [남자들뿐인데 와서 뭐 하려고?] 그러자 송주아가 애교를 부렸다. [오빠가 보고 싶어서 그러지. 혹시 거기에 숨기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내가 보면 안 되는 사람?] 하태원이 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리가.] 송주아가 키스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럼 지금 갈게.] 기사가 도착한 후 방세린은 룸을 나섰다. 차에 타려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핑크색 벤틀리가 달려와 클럽 앞에 멈추는 걸 목격했다. 송주아가 몸에 딱 붙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차에서 내렸다. 도어맨은 즉시 그녀에게 다가가 차 키를 받아 차를 주차하러 갔다. 방세린이 차 문을 잡은 손을 멈칫한 채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님, 먼저 들어가세요.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요. 일이 끝나면 알아서 택시 타고 갈게요.” 기사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차를 몰고 떠났다. 방세린은 다시 룸 문 앞으로 왔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룸 안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문틈 사이로 송주아가 하태원의 무릎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하태원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제발 염장 좀 지르지 마. 우리 싱글들의 기분도 좀 생각해줘.” 송주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태원의 품에 더 파고들더니 코를 씰룩거리며 주성태에게 새침하게 물었다. “이 방 왜 이렇게 구린내가 나? 혹시 내가 오기 전에 이상한 사람이 왔었어?” 주성태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어? 태원 형이 주아 씨의 사람인 걸 누가 몰라? 우리가 다 지켜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형 주변에 여자라곤 없어.” 거짓말인 걸 뻔히 알면서도 송주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문밖에 있던 방세린은 주먹을 꽉 쥔 채 속으로 싸늘하게 비웃었다. ‘전부 다 똑같은 놈들이야.’ 그 후 그들은 진실 게임을 시작했다. 첫 번째로 하태원이 걸렸고 누군가가 음흉하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주아 씨랑 진도 어디까지 나갔어?” 뜻밖에도 하태원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마지막 단계 빼고는 다 해봤지.” 그러자 송주아가 부끄러워하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룸 안의 사람들 모두 크게 놀랐고 문밖에 있던 방세린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가 놀리듯이 말했다. “뭐야? 하 대표 안 되겠는데?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어?” 하태원이 송주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아는 내 미래 와이프인데 당연히 소중하게 아껴줘야지.” “또 염장 지르네.” 룸 안 곳곳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세린은 하태원과 금방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사귄 지 일주일도 채 안 됐는데 하태원은 그녀와 잠자리를 하려고 안달이 났었다. 끝난 후 땀으로 젖은 그녀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감미롭게 속삭였다. “세린아, 널 너무 사랑해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서 방세린은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저 즐기는 여자였으니 당연히 배려할 필요도 없지. 방세린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더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어 몸을 돌려 떠났다. 밖으로 나와 보니 언제부터인지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방세린이 넋이 나간 얼굴로 클럽 문 앞까지 걸어가더니 빗속으로 발을 내딛으려 하자 도어맨이 급히 막았다. “손님, 제가 우산을 가져다드릴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대로 그냥 나가시면 감기 걸려요. 그럼 가족과 애인이 걱정하실 거예요.” ‘가족?’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가 일곱 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애인은 지금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인을 품에 안고 있는데 그녀를 걱정할 겨를이 있을까? 방세린은 못 들은 척하고 빗속으로 걸어가 외로이 앞으로 나아갔다. 차가운 빗물이 얼굴에 쏟아졌고 과거 하태원과 함께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 거짓이었어. 전부 다 거짓이었다고.’ 비가 도시 전체를 씻어내려는 듯 점점 더 거세졌다. 그리고 그녀가 하태원에게 느꼈던 사랑, 아쉬움, 애착 또한 비와 함께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방세린의 의식이 점점 흐릿해졌다... “방세린!” 누군가 달려와 비틀거리는 그녀를 붙잡았다. 희미하게 눈을 뜨고 눈앞의 남자를 보았는데 흐릿한 그림자가 하태원의 얼굴로 바뀌었다. “태원 씨...” 방세린은 중얼거리다가 곧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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