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3년 전으로 회귀하다
“민유한 때문에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렇게도 그놈과 결혼하고 싶어?!”
익숙한 호통 소리에 신지은은 몸을 움찔 떨며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뭐지? 오빠 목소리가 왜... 혹시 환청인가? 하지만... 나는 그때 죽었잖아?’
신지은은 벙찐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분노로 잔뜩 얼룩진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마치 온몸에 전류가 흐른 듯 신경 하나하나가 멋대로 날뛰는 느낌이 들었다.
“인호 오빠...”
신지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가도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강인호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벅차오르는 마음에 그를 와락 끌어안으려는데 강인호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쥔 채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지은은 그제야 통증을 느끼며 시선을 내렸다.
‘이게 무슨!’
깜짝 놀란 그녀가 입을 떡하고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손목에 아주 깊은 상처가 나 있었으니까. 게다가 상처 한가운데는 유리 파편도 박혀 있었다.
“대답해. 꼭 그놈과 결혼해야겠냐고 묻잖아!”
머리 위에서 또다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딘가 익숙한 상황에 신지은은 머리가 윙윙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제야 주변을 훑어보았다.
수십 쌍의 시선들이 전부 다 그녀 쪽을 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회귀 전, 대학교를 막 졸업했던 그날, 신지은은 민유한이 프러포즈해 온 일로 강인호에게 엄한 경고를 받았다.
그 경고에 기분이 확 상해버린 그녀는 씩씩거리며 연회장으로 찾아갔고 몇십 명의 회사 이사진들이 있는 자리에서 결혼을 허락해 달라며 강인호를 몰아붙였다.
심지어 나중에는 테이블 위에 있는 와인병을 깬 후 그 파편으로 자신의 손목을 긋기도 했다.
생각보다 더 격한 반응에 강인호는 결국 그녀의 결혼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신지은은 결혼 승낙과 함께 그 뒤로 강인호와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내가 3년 전으로 돌아왔다... 이 말이야?’
강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신지은을 보며 비참함이 가득 담긴 실소를 터뜨리더니 이내 손을 풀어주었다.
“그래, 해. 허락할게.”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더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다.
“잠깐만... 뭐?”
신지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강인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안 돼! 허락하지 마!”
강인호의 고개가 다시금 신지은 쪽으로 돌아갔다. 늘 평온하던 검은색 눈동자가 오늘만큼은 꼭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 민유한이랑 결혼 안 해. 싫어! 오빠,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오빠 말 잘 들을게. 그러니까 나 보내지 마... 보내지 마...”
신지은의 두 손이 정처 없이 떨렸다.
민유한은 악마 그 자체였다.
회귀 전, 민유한은 신지은의 제일 친한 친구였던 손아영과 손을 잡고 신지은을 속여 그녀의 재산을 통째로 꿀꺽해 버렸다.
그 사실을 안 강인호가 강하게 압박하자 민유한은 신지은을 납치한 척 강인호를 외딴곳으로 유인해 냈다. 그러고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강인호를 활활 타오르는 불바다 속에 가둬두고 천천히 죽어가게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강인호의 장례식날, 민유한은 강인호의 무덤 앞으로 찾아가 신지은을 자기 아래에 깔아뭉개고는 해서는 안 되는 짓까지 저질렀다.
신지은은 민유한이 무덤을 향해 내뱉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당신이 아끼고 또 아끼던 보물이 지금 내 아래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곳에서 똑똑히 지켜봐!”
그날 이후, 민유한은 신지은을 마치 개처럼 집에만 가둬두고 온갖 더러운 짓을 해댔다.
다만 그 사실은 얼마 안 가 손아영의 귀에 흘러 들어갔고 손아영은 사람들을 시켜 신지은의 아래쪽을 꿰맨 후 외딴섬에 보내버렸다.
더러운 남자들의 손에 떨어진 신지은은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고통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결국 비참하고 치욕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신지은은 끔찍했던 과거 일이 떠오른 듯 몸을 덜덜 떨며 강인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오빠, 나 아파... 너무 아파... 이만 집으로 가면 안 돼? 가자... 제발...”
뜨거운 눈물이 강인호의 셔츠 앞섬을 적셨다.
강인호는 신지은이 무슨 생각으로 갑자기 이러는 건지는 잘 몰랐지만 그녀의 입에서 아프다는 말이 나온 순간, 저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해서는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래, 집에 가자.”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매우 다정한 목소리였다.
강인호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비즈니스계의 귀재로 재계는 물론이고 정계 사람들까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그런 남자였다.
하지만 그런 남자에게도 약점이자 그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신지은이었다.
신씨 가문의 외동딸이었던 신지은은 어릴 때부터 강인호와 친했고 거의 친남매처럼 그와 함께 붙어 다녔다.
하지만 평화로운 나날은 오래 가지 못했고 그녀는 5살이 되던 해, 갑작스러운 사고와 함께 하루아침에 부모님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녀 역시 숨이 미약하게 붙어있는 채로 중환자실에 옮겨졌다.
모든 이가 다 살릴 수 없을 거라고, 이만 희망의 끈을 놓으려고 했을 때, 오직 강인호만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 간절함이 통했던 걸까, 신지은은 결국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 돌아왔다.
강인호는 신지은과 고작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마치 친부모처럼 그녀를 아끼고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
...
병원에 들러 상처를 다 꿰맨 후, 강인호와 신지은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신지은은 마치 강인호가 자신의 일부라도 되는 듯 차에 오르자마자 그의 몸에 찰싹 기댔다.
“똑바로 앉아.”
강인호가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를 밀어냈다.
이에 신지은은 끙하며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그의 팔을 더 세게 끌어당겨 잡고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오빠, 나 손이 너무 아파...”
강인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나 때문이지... 그래서 이렇게 반성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주면 안 돼? 응?”
신지은은 고개를 들며 애교 부리듯 말했다. 그런데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탓에 강인호와 아주 살짝 입술이 닿아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