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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말을 마친 하도하는 이내 백 집사를 불러 서재로 들어갔다. 성지원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백 집사가 찾아와 노크하기 전에 치맛자락을 내리고 소파에 웅크려 앉았다. 서재에서 나온 하도하는 소파에 한껏 웅크려 있는 성지원을 보았다. 성지원의 모습은 마치 길 잃은 고양이처럼 작고 초라해 보였지만 하도하의 마음은 쇳덩이처럼 단단하고 차가웠다. 그 어떤 동정의 감정이 들지 않았다. 하도하가 나오자 성지원은 재빨리 얼굴의 슬픔을 지워내고 힘겹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상처를 전부 드러내서는 안 된다. 어떤 상처는 혼자 있을 때 조용히 치유하는 것이었다. 그는 말없이 다가가 성지원 앞에 계약서를 툭 던졌다. “10분 줄게요. 그 안에 사라져요.” 이내 하도하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계약서를 든 성지원은 아주 진지하게 읽어보았다. 계약 조항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결혼 기간 동안 하도하가 성준혁을 대신해 제이원 그룹을 맡아주겠다고 적혀 있었다. 성준혁이 깨어나기 전까지 말이다. 그리고 성지원은 하씨 가문의 며느리로서 하씨 가문의 명성에 먹칠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하우주를 친아들처럼 아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볼드체로 강조된 문장이 있었다. ‘을은 반드시 갑의 말에 복종해야 하며 갑에게 언제든지 이 결혼을 종료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때 을은 빈손으로 하씨 가문을 떠나야 한다.' 이 글을 본 성지원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부터 그녀는 이 냉정한 남자와 함께 살아가야 했을 뿐 아니라 잘 보이려고 애써야 했다. 계약서에 아이를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아 하도하는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을뿐더러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다는 뜻이었다.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본 성지원은 망설임도 없이 서명한 후 지장을 꾹 찍었다. 백 집사는 계약서를 챙기며 공손하게 성지원을 향해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성지원 씨. 이제부터 성지원 씨는 하씨 가문의 며느리입니다. 저는 하씨 가문의 집사이니 그저 백 집사라고만 불러주시면 됩니다. 내일 오전 8시에 구청에서 뵙지요.” ‘내일 바로 혼인신고 한다고?' 성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집사님. 8시에 꼭 도착할게요. 그럼 제 동생은요?” 성지원은 조금 걱정되었다. 그러자 백 집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련님께서 12시 전에 데리고 성씨 가문으로 가겠다고 하셨으니 약속을 지킬 겁니다.” 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니 성지원은 이상하게도 백 집사의 말이라면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게 되었다. 하도하의 방에서 나온 성지원은 조금 전 있었던 일이 꿈만 같게 느껴졌다. 자신이 정말로 낯선 남자와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성지원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도하가 욕실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백 집사를 보며 말했다. “사람 붙여서 잘 감시해요.” 앞으로 하우주를 성지원의 손에 맡겨야 했으니 하우주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성지원의 일상을 감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안채에서 나온 성지원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아린을 발견했다. 강아린의 옆에는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다. “형수님.” 남자들은 초조한 얼굴로 성지원에게 다가간 후 이구동성으로 성지원을 불렀다. 성지원은 다친 팔을 자연스럽게 뒤로 숨겼다. 그녀를 부른 사람들은 바로 마승진과 최민성 그들이었다. 마승진은 성지원 앞으로 다가가 미안함을 잔뜩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수님, 집안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 우리도 방금 알았어요. 근데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정우가 분명...” “승진 씨.” 성지원은 담담한 목소리로 마승진을 불렀다. “더는 날 형수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앞으로는 내 이름으로 불러줘요. 그리고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나도 그렇고 우리 가족들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그 사람 앞에서 내 얘기하지 말아줘요. 분명 기분 나빠할 테니까. 그 여자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그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려면 내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럼에도 마승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형수님, 정말로 정우를 포기하려고요?” 사실 그들은 나약하기만 한 백설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오로지 성지원뿐이었다. 여하간에 성지원과 함께 보낸 시간이 더 길었으니까. 그간 쌓은 추억도 많았고 이미 성지원이 그들의 형수님이 되어있었던지라 아무도 성지원을 대신할 수 없었다. 성지원은 마승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멀쩡한 손을 들어 마승진의 어깨를 툭툭 두어 번 두드리며 익숙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승진 씨랑, 민성 씨, 원호 씨를 알게 되어서 정말 기쁘고 좋았어요. 앞으로도 꽃길만 걷길 바라요.” 말을 마친 성지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씨 가문을 떠났다. 마승진 일행은 떠나가는 성지원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정우가 왜 성지원을 떠나버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씨 가문에서 나온 성지원은 자신의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강은호를 발견했다. 강은호는 오로지 그녀만 빤히 보고 있었다. 성지원이 차에 올라타자 강은호도 따라 탔다. 강은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성지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자 마침 누군가 성지원에게 연락했다. “지원아, 어디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바로 김희영이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아 이미 멘탈이 곧 무너질 듯했다. “지은이는 찾았어? 얼른 엄마한테도 알려줘. 지은이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줘, 제발...” 성지원은 바로 차분하게 달래주었다. “엄마, 저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어요. 저랑 같이 집에 가요. 집에 도착하면 지은이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다행히 하도하를 설득한 성지원은 이런 말로 김희영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김희영은 이미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전화를 끊자마자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은호가 주먹으로 창문을 쳐버린 것이다. ‘난 왜 이렇게 무능한 거야. 결국 지원이가 그 불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잖아!' 성지원과 강은호의 관계는 마승진 일행들과 달랐다. 성지원은 유치원생 시절부터 강은호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함께 자라 친남매 같은 사이였다.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안 성지원이었지만 강은호를 달래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강은호도 어쨌든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어디 가려고?” 성지원은 고개를 돌려 강은호를 보았다. “여긴 병원으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 강은호는 앞만 주시한 채 성지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길이 보였고 성지원은 그제야 강은호가 문정우의 집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소리쳤다. “차 세워! 차 세우라고! 대체 나를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은 거야?” 성지원에게 남은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었지만 강은호는 그녀의 자존심 따위를 지켜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강은호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난 네가 그 악마랑 결혼하는 꼴은 절대 못 봐. 이 일은 문정우 때문에 일어난 거니까 문정우가 책임져야 해.” 성지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 속에는 조소와 슬픔이 가득했다. “문정우는 신경조차 쓰지 않을 거야. 지금 우리 가족을 증오하고 있는데 왜 신경 써주겠어.” 그러나 성지원은 강은호를 더 말리지 않았고 여전히 문정우에게 기대를 품고 있었다. 차는 문씨 가문 앞에서 멈춰 섰다. 강은호는 문정우에게 연락했다. 문정우는 한참 지나서야 강은호의 연락을 받았다. “문정우, 나와 지원이가 지금 너희 집 앞에 있어. 할 얘기가 있으니까 나와.” 성지원은 문정우의 방 커튼이 쳐지는 걸 보았다. 커튼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왔고 문정우가 서 있었다. 강은호가 스피커폰으로 켜자 차 안에 문정우의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내가 할 말은 이미 다 했어. 난 다시는 걔 보고 싶지 않아.” 강은호는 무정한 문정우의 말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문정우, 지원이가 오늘 어딜 간 줄 알아?” “관심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강은호는 창백해진 성지원의 안색을 보았다.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어 화를 내려던 때 성지원이 그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이건 내 입으로 꼭 해야 하는 말이야.” 성지원은 직접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내일 하도하라는 남자와 혼인신고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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