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이 피부도 타고난 거예요. 아무리 비싼 화장품을 써도, 시술을 받아도 이런 피부는 못 가꿔요.”
성지원의 외모만큼이나 피부 또한 해성에서 좋기로 유명했다. 돈을 들여도 가꿀 수 없는 꿀피부였다.
그녀는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집안도 반듯하죠. 해성에서 우리 성씨 가문은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어요. 나이도 하도하 씨와 비슷하기도 하고요. 저를 아내로 맞이해도 절대 하도하 씨 체면을 떨어지게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하도하는 아주 진지하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천연 미인이라고 소개하는 성지원을 진지하게 훑어보았다. 확실히 그럴 자격이 있긴 했다. 이내 하도하의 시선이 성지원의 목선으로 향했다.
“들어보니 확실히 성지원 씨가 적임자 같군요. 하지만 제 기억이 맞는다면 성지원 씨에겐 오랫동안 교제한 약혼자가 있었던 거로 압니다. 우리 가문 며느리라면 순결해야 하는데 성지원 씨는 순결한가요?”
성지원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모욕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들어 하도하를 보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순결하다는 걸 증명만 하면 결혼해줄 건가요?”
하도하는 단정하지 않았지만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으며 말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죠.”
그 시각 메인 홀에서.
진유미는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집안 배경이 좋은 남자들이 다가와 춤을 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엄마, 성지원은 대체 언제 쫓겨나는 거예요?”
한영숙은 여유롭게 웃으며 진유미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 성지원이 오늘 이 가문에 남아 자고 간다고 해도 하도하와 결혼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도하도 그냥 성지원을 가지고 놀 뿐이야.”
진유미는 한영숙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한영숙은 하도하가 성씨 가문에서 당했던 옛일을 들려주며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하도하는 절대 성지원과 결혼해주지 않아.”
그제야 진유미는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옛날에 성지원의 생일 파티가 열렸을 때 하도하도 참석했지만 성지원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하도하를 거절하고 다리가 한쪽뿐인 문정우를 택하며 웃음거리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 여자가 이제 와서 하도하에게 접근한다니, 스스로 웃음거리를 자초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성지원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진유미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다시 돌아와 저택의 2층에서.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그러니까 증명만 하면 나와 결혼해주겠다고?'
입술이 하도하의 얼굴이 닿기 직전에 하도하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성지원의 목을 졸랐다. 하도하는 정말이지 망설임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성지원의 눈동자에서 서서히 빛이 사라져 갔다. 절망이 그녀를 삼키기 시작했다.
‘실패야. 실패했다고!'
성지원에게 남은 기회라고는 이것뿐이어서 그런지 더 깊은 절망에 빠졌다.
하도하는 악력을 주지 않았다. 성지원은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단호한 눈빛으로 다시 한번 하도하를 덮치려고 했다. 하도하의 안색이 어두워지고 이번에는 훨씬 강하게 성지원의 하얀 목을 꽉 잡았다.
“누구 마음대로 내 몸에 손대는 거죠?”
말을 마친 후 성지원을 옆으로 밀어냈다.
쿵.
성지원은 단단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도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처참해진 성지원의 꼴을 보았다. 대놓고 더러운 쓰레기 보듯 한 눈빛으로 보았다.
“꺼져요.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고.”
그 말에 성지원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럼에도 하도하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고 차갑게 방을 나가려 했다. 문이 닫히려던 순간, 가느다란 손이 문틈 사이로 억지로 들어와 문틈을 막았다. 하도하는 그런 성지원을 보며 잠시 의아한 눈빛으로 보았다.
성지원은 자존심이든 손목에서 전해지는 고통이든 신경 쓰지 않고 일어나 하도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도하 씨, 6년 전의 일로 절 미워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6년 전 그녀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하도하를 거절하고 문정우를 택해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이 일을 성지원은 잊지 않았다.
하도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성지원 씨는 착각이 심하군요. 내가 고작 그 정도 일로 복수하는 사람으로 보여요?”
“그래요. 그러면 하도하 씨가 그냥 여자를 싫어하는 거라고 받아들일게요. 결혼한 후에도 절대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없는 듯 조용히 지낼게요. 하도하 씨도 아까 보셨잖아요. 어르신과 우주가 절 좋아하는 모습을요. 저랑 결혼하면 어르신께도 잘해드릴 거고 우주도 잘 돌볼 수 있어요. 아이가 단 하루도 상처받게 하지 않을 거고 매일 웃게 해줄게요.”
하도하는 문틈에 눌린 성지원의 손목을 보았다. 이미 빨갛게 부어올랐지만 성지원은 아픔 따윈 느끼지 못하는 듯 단호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 여자는 대체 어떤 사람이지?'
짧은 생각에 잠긴 후 하도하는 다시 원래의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믿을 거로 생각해요?”
‘여자들이 제일 잘하는 게 거짓말하고 연기하는 거 아닌가?'
“제 말, 끝까지 들어보면 분명 믿게 될 거예요.”
성지원은 자신의 처지를 전부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하도하가 자신을 믿지 않으니 거래를 한다면 어쩌면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성지원의 예상대로 하도하는 생각에 잠겼다.
고작 짧은 몇십 초의 시간이 성지원에게 한 세기처럼 길게 느껴졌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성지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쥐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하도하가 입을 열었다.
“약속 지켜야 할 거예요. 못 지키면 성씨 가문을 없애 버릴 거니까.”
하도하는 드디어 성지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순간 성지원은 코끝이 찡해졌다. 울지 않으려고 꾹 참고 있었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말을 이을 수 없었던지라 고개만 끄덕였다.
‘지은이를 구할 수 있어. 우리 가문도 지킬 수 있다고!'
그런 성지원의 모습에 하도하는 우습기 그지없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문틈에 손목이 끼어 부러질 뻔해도 울지 않던 여자가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눈물을 흘리니 말이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웃기도 해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하도하는 성지원을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기뻐하기엔 일러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까.”
성지원은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의사를 불러 검사해봐도 돼요. 제가 순결한지 아닌지를 확인하면 알게 될 거예요.”
그러자 하도하가 말했다.
“난 아무도 안 믿어요.”
그의 말에 성지원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하도하에게 밀쳐져 소파에 눕게 되었다. 다음으로 벌어진 일은 성지원이 살면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치욕이었다. 옷은 찢어진 곳 없이 멀쩡했지만 치맛자락은 허리 위로 걷혔고 온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도하는 손을 닦은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차갑게 말했다.
“12시 전까지 동생을 무사히 데려다주죠. 도착하기 전까지 멀쩡하다면.”
그 말을 들은 순간 성지원은 그간 문정우가 자신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