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하도하는 이미 통화를 끝낸 뒤였다. 이연자의 부름에 낯빛이 살짝 어두워지긴 했지만 조용히 이연자의 앞으로 다가왔다.
여자들의 시선이 하도하를 향해 따라갔다.
차가운 표정과 고귀한 기품을 보니 진유미는 처음부터 하도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첫눈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남몰래 한영숙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한영숙은 딸의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지라 손등을 토닥여주었다.
하도하가 걸음을 멈추자마자 한영숙은 성지원을 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지원이가 어렸을 때부터 늘 인기가 많았지. 만약 지원이와 정우의 아이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엄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진유미는 황급히 한영숙을 말리는 척했다.
한영숙은 말실수했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폭탄은 던져졌다.
“아이라니. 무슨 아이를 말씀하는 거죠?”
“어머나, 성지원에게 아이가 있었어요?”
그러자 한영숙은 부랴부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전 방금 말실수 한 거예요. 지원이가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말을 한다는 게 혀가 꼬였네요.”
그러나 한영숙의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진유미는 슬쩍 이연자를 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이연자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이연자는 성지원을 보며 조금 전보다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성지원 씨, 난 성지원 씨 설명을 듣고 싶은데.”
성지원의 시선이 하도하에게로 향했다. 하도하는 여전히 냉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고 마치 모든 일과 상관없는 듯한 무심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기죽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해 주었다.
“큰어머니와 사촌 오빠가 일부러 이러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전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러니 어르신께 부탁드릴게요. 실력 좋은 산부인과 전문의를 불러 제 결백을 증명하게 해주세요. 전 큰어머니와 사촌 오빠의 말실수에 명예가 더럽혀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산부인과 전문의를 불러 달라고? 대체 무슨 용기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설마 정말로 그동안 단 한 번도 잠자리를 가지지 않은 거야?'
당당한 성지원의 모습에 한영숙은 바로 눈치채고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지원아, 난 그런 뜻이 아니라...”
“난 믿어.”
이때 한 어르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지원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연자는 편들어 준 사람을 흘끗 보더니 이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성지원의 손을 잡았다.
“지원 씨, 나도 지원 씨를 믿어요.”
조금 전 성지원의 편을 들어준 사람은 바로 차화정이었다. 성지원과 대화할 기회를 잃은 차화정은 씩씩대며 이연자를 째려보았다.
‘저 할망구가 진짜! 분명 나와는 지원이를 빼앗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나중에 우리 예성이한테는 어떻게 설명하라고!'
말을 마친 이연자는 갑자기 표정이 진지해졌다.
“지원 씨가 우리 우주의 엄마가 되어준다면 할머니로서 절대 지원 씨 헐뜯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 말을 들은 한영숙과 진유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만약 성지원이 하씨 가문에 시집간다면 그들이 오늘 내뱉은 말은 전부 하도하의 얼굴에 먹칠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 후환을 상상만 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성지원도 이연자가 자신의 편을 들어줄 줄 몰랐던지라 고마워하며 이연자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할머니. 절대 할머니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을 거예요.”
성지원의 아부에 하도하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성지원 씨, ‘할머니'라는 호칭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자 이연자가 하도하를 째려보았다.
“도하야, 너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냉기가 흐르는 하도하의 눈빛에 진유미 모녀와 지켜보던 사람들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지원이 아무리 이연자의 환심을 샀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도하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는 것이었다.
성지원은 하도하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이연자와 하우주의 인정을 받았으니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 순간 음악이 울려 퍼지며 커다란 홀에 정장 차림의 신사들이 여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연자는 하우주를 안은 채 사람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자자, 우리 늙은이들 주위에 너무 몰려있지 말고 다들 가서 즐겁게 춤을 추세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성지원은 먼저 하도하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하도하 씨, 저와 한 곡 추지 않으실래요?”
하도하는 자신을 향해 내뻗은 그녀의 하얀 손을 보고서는 차갑게 말했다.
“흥미 없습니다.”
말을 마친 후 더는 머물기 싫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그럼에도 성지원은 화를 내지 않았고 태연하게 손을 내리며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어르신들과 인사를 한 뒤 하도하를 쫓아갔다.
그런 성지원의 모습을 본 일부 여자들은 화를 내며 말했다.
“성지원도 참 뻔뻔하네요. 하도하 씨가 싫어하는 게 눈에 안 보이나 봐요.”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성지원의 행동에 미간을 구기며 수치심도 없는 여자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성지원에게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한영숙과 진유미, 진유준도 그곳에 있었던지라 사람들의 얘기를 전부 듣고 있었다. 파티가 끝나는 순간 분명 진형문에게 고자질할 것이었던지라 성지원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조금만 망설여도 성지원의 동생은 위험해지게 되었다.
“도하 씨, 하도하 씨! 잠시만요!”
하도하의 걸음은 아주 빨랐다. 성지원은 치맛자락을 들고 뛰어갔다. 그러나 하도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안채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방에 올라갔다.
“하도하 씨, 제게 10분만 시간을 주세요. 아니, 5분만 줘도 돼요. 절대 시간 끌지 않을게요.”
하도하가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성지원은 얼른 속도를 내서 쫓아갔다. 이때 하도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성지원은 그대로 그와 부딪치고 말았다. 겨우 중심을 잡자 자신을 비웃는 하도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하도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전부 듣고 있었던 것이다.
성지원은 자신이 얼마나 다급해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확실히 하도하에게는 결혼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해를 풀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하도하를 보며 말했다.
“하도하 씨한테 지금 아내가 필요하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 절 진지하게 고려해 주세요.”
하도하는 불쾌한 듯 미간을 확 구겼다.
“누가 그쪽한테 그런 말을 한 거죠?”
“하도하 씨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잖아요. 그런데도 어르신이 원하시는 대로 맞선 파티를 열었다는 건, 확실히 아내가 필요하다는 의미잖아요. 그리고 하도하 씨 같은 사람은 한번 결정한 일은 도중에 포기하지 않겠죠.”
성지원은 논리정연하게 말을 이었다.
“결국에 어르신의 마음에 들고 우주도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 거잖아요. 아직 아이에게는 따듯하고 온전한 가정이 필요하니까요. 지금 상황을 봤을 때 그 적임자는 바로 저예요.”
하도하는 성지원이 확실히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다. 성지원을 훑어보던 그는 차갑게 픽 웃었다.
“성지원 씨의 그 용기가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네요. 대체 왜 내가 그쪽을 선택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죠?”
성지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우선 전 이미 하도하 씨 할머니와 아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둘째로 한 미모 하거든요. 해성에서 손꼽히는 수준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자연산이에요. 손 하나 댄 적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