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이 파티에 아무리 여자가 많다고 한들 품격이 없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쟤는 왜 아직도 안 갔대? 무슨 낯짝으로 버티고 있는 거지?”
“그러게. 진짜 대단하다. 저런 말까지 들었으면 보통은 울면서 뛰쳐나가지 않나? 나였어도 저렇게 뻔뻔하게 버티고 있지 못했을 거야.”
이런 그들의 말쯤은 성지원에게 아무런 상처도 되지 않았다.
이연자 쪽으로 다가가자 몇몇 사람들은 마치 더러운 것에라도 닿을까 두려운 듯 고개를 돌리며 몸을 피했다. 그 결과 성지원과 이연자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한 줄의 길이 생겼다. 성지원은 이미 감정을 추스르고 우아하게 이연자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 저는 성씨 가문의 장녀 성지원입니다. 처음 인사드려요. 불쑥 찾아오긴 했지만 실례가 안 되었기를 바라요.”
이연자는 성지원을 훑어보았다. 곧이어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는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성지원 씨는 이번 초대 명단에 없었던 거로 아는데요.”
그러자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지원이 태어났을 때 최무영이 직접 나서서 그녀가 큰 복을 타고났다고 말했고 남편은 물론 자식에게도 복을 줄 수 있는 팔자라고 했던지라 선 자리 제안이 쇄도했었다. 나중에 성씨 가문은 실제로 급성장했고 최무영의 말대로 성지원은 해성 제일가는 재벌가 딸로 불리게 되었다. 심지어 가문에 내놓은 자식 취급받았던 성지원의 약혼자 문정우도 승승장구하며 한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님이 되어버렸다. 그간 성지원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문정우가 파혼을 선언하고 성준혁마저 병원 신세이니 그 화려했던 명성은 한순간에 비웃음거리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최무영의 말도 결국은 헛소리였다고 비꼬기도 했다. 모든 것은 우연일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문정우가 왜 성지원을 떠나버렸겠는가.
이때 옆에 있던 남희수가 비웃듯 말했다.
“하, 맞선 파티에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찾아오다니. 그 유명한 성지원이 이럴 줄은 몰랐는데 체면이고 뭐고 없나 보네.”
진유미 옆에 있던 허지아도 덧붙였다.
“아무리 문정우가 버렸다고 한들 이렇게 급하게 다른 남자 찾는 건 아니지 않나?”
듣기엔 악의가 그리 크게 없는 것 같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악의가 가득했다.
이번에는 진유미가 나서서 허지아를 나무랐다.
“지아야, 그만해. 분위기 흐리지 마.”
이 한마디에 진유미는 의외로 호평을 얻었다. 다행히 이연자는 남들의 수군거림에 쉽게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이연자는 다시 성지원을 보며 물었다.
“성지원 씨가 여긴 왜 왔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성지원은 솔직하게 말했다.
“전 어르신 손자인 하도하 씨 때문에 왔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성지원의 용기에 대단하며 감탄했다.
이연자는 그런 성지원을 보았다. 확실히 얼굴도 예쁘고 기품 또한 남달랐으며 눈도 맑았다.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당당해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이 아무리 그녀를 깎아내려도 흔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품위를 지키고 있어 오히려 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연자는 문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 일은 내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이렇게 하지요. 우리 도하가 우주를 가장 아끼니 우주를 웃게 만들 수 있다면 도하도 아가씨를 다르게 볼지도 모르죠.”
그 말을 들은 진유미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저 아이를 웃게 만들라고? 저 아이는 누가 봐도 자폐가 있어.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극도로 높고 낯선 이와도 접촉을 거부하는데 어떻게 웃게 만들 수 있겠냐고. 하하하. 성지원이 하루종일 달래줘도 웃어주지 않을 거야.'
사람들도 진유미와 같은 생각을 하며 이연자가 일부러 성지원을 난처하게 만드는 속셈이라 여겼다. 조금 전 남희수가 케이크 세례를 당한 것처럼 성지원도 곧 이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이연자의 말에 성지원은 시선을 돌려 하우주를 보았다.
하우주는 커다란 눈으로 성지원을 빤히 보고 있었다. 또래답지 않게 맑은 눈은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성지원도 다정한 미소를 머금게 되었다.
“안녕, 꼬마야. 우리 또 만났네?”
하우주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성지원은 미소를 지으며 하우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다정했다.
“꼬마야, 이모가 안아봐도 될까?”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조가현이 달래려다가 완전히 무시당한 걸 보았기에 아이에게 예쁜 얼굴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지원도 굴욕을 맛보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어딜 가나 성지원의 미모에 압도당했던 그들이었던지라 너무도 얄미웠고 드디어 성지원도 굴욕을 맛보게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고소해했다.
그 순간 모두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다들 저마다 눈을 의심했다.
그 냉랭하고 무표정했던 아이가 하얗고 포동포동한 손을 성지원에게 내민 것이 아닌가. 이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었다.
이연자마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주가 낯선 사람의 품에 안기다니. 다른 사람한테 마음을 연 건 처음 보는군.'
작고 말랑한 아이의 몸에서는 우유 향이 가득했다. 성지원은 저도 모르게 아이를 꼭 끌어안으면서 참을 수 없는 사랑스러움에 이끌려 포동포동한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이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이내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며 서툴지만 분명하게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웃었다. 아이가 웃었어!'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채 성지원을 보았다. 성지원은 아이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지원의 아름다운 미소 앞에서는 나이 불문하고 누구나 마음 여는 것이라며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이연자를 보니 이연자는 어느새 흐뭇한 눈빛으로 성지원을 보고 있었다.
이때 진유미가 성지원에게 다가가며 품에 안긴 아이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주야, 너무 귀엽다. 이모도 안아보면 안 될까?”
그러나 하우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진유미를 보더니 곧이어 얼굴을 성지원의 어깨에 파묻으며 진유미를 피해버렸다.
진유미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리며 웃음이 사라지다가 성지원을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하, 우주가 언니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성지원은 담담한 눈빛으로 가식적인 진유미를 흘끗 보며 말했다.
“글쎄. 나도 우주가 이렇게 얌전한 줄은 몰랐네.”
얌전하다는 말은 진유미를 비꼬는 말이었다. 성지원은 아주 담담하게 말 한마디로 진유미를 상대했다.
보면 볼수록 성지원이 마음에 들었던 이연자는 옆에 있던 도우미를 불렀다.
“가서 성지원 씨 생년월일 적힌 종이를 가져와요.”
해성의 어르신들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절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등 사주팔자와 관상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현재 이연자는 성지원의 사주를 직접 확인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이 말인즉슨 성지원을 며느릿감 후보로 받아들이고 하도하와 어울리는 사주이면 성지원이 하도하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조가현은 성지원을 보며 복잡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성지원,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진유미 역시 속이 타들어 갔다. 행여나 성지원이 하도하의 마음에 들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아버지가 준비한 모든 계획은 어그러지게 되니까. 그래서 성지원이 나타나자마자 오빠를 시켜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성지원이 절대 하도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런데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주목을 받으며 이연자의 환심을 사게 될 줄은 몰랐다.
‘안 돼. 절대 내버려 둘 수 없어.'
이연자는 이내 하도하를 불렀다.
“도하야, 이리로 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