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진유미 옆에 있던 허지아는 잔뜩 화를 냈다.
“남희수 쟤 뭐야? 너무 하잖아! 조가현 옆에 찰싹 들러붙어서 아부 떨겠다고 아무 말이나 막 하고.”
진유미는 크게 심호흡한 후 말했다.
“괜찮아. 화낼 필요 없어. 조만간 내가 한마디도 못 하게 할 거니까.”
‘며칠만 기다려. 딱 며칠이면 돼. 아빠가 제이원 그룹 지분 손에 넣고 제이원의 주인이 되면 사람들이 성지원에게도 관심을 끄게 될 거야. 그러면 미모와 공부가 전혀 뒤처지지 않는 내가 해성에서 제일 돈 많고 아름다운 재벌 2세가 되니까.'
‘조가현은 어차피 집안이 나보다 조금 좋을 뿐이잖아. 우리 아빠가 제이원의 주인이 되면 내가 더 우세야. 그리고 날 비웃은 연놈들 전부 다 기억하고 있겠어. 나중에 내가 당한 수모 열 배로 되돌려 줄 거라고. 꼭!'
같은 시각 파티에 참석한 사모님들은 저마다 함께 온 딸을 불러 어르신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 이 파티에 참석한 젊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재벌가에서 자란 귀한 집 딸들이었다. 그들에겐 저마다 자존심이 있었던지라 설령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먼저 다가가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 행동은 경솔하고 가벼워 보일 수 있었고 괜히 사람들의 뒷말을 사기 딱 좋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진유미였다.
이 자리에 나온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교양 있고 우아하며 지혜로운 자신의 매력을 짧은 시간 안에 한껏 보여주어 이곳에 나온 어르신의 환심을 사는 것이다.
이연자의 품에 안긴 아이는 하도하와 가까워지기 위한 가장 빠르고 확실한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깨닫게 되었다. 작은 아이는 하도하 못지않게 까다롭다는 것을. 아무리 달래주어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남희수는 혼자 잘난 척하며 달콤한 디저트를 들고 아이에게 다가갔지만 아이는 귀찮다는 듯 짜증을 내더니 조그마한 케이크를 집어 냅다 남희수의 얼굴에 던졌다. 케이크 생크림이 얼굴에 잔뜩 묻은 남희수는 꼴이 처량하기 짝이 없었고 수치심에 눈물까지 맺히기 직전이었다. 이연자는 깜짝 놀라 급히 남희수에게 사과한 뒤 도우미를 불러 욕실로 데리고 가게 했다. 어머니인 한영숙의 옆으로 돌아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유미는 그제야 기분이 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우주의 행동으로 그들은 다가가기 망설였다. 말도 없고, 웃지도 않고, 심지어 울지도 않는 하도하의 아들을 보며 속으로 벙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한편 남자들은 한쪽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남의 집 귀한 딸들을 슬쩍 훑어보고 있었다. 하도하는 혼자 뒷자리에 앉아 있어 마치 일부러 외면당하고 있는 듯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분위기였지만 그가 뿜어내는 강대한 아우라는 누구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성지원은 피아노 앞에서 일어나 몇몇 어르신이 모여있는 자리로 갔다. 그제야 누군가 성지원을 알아보고 말했다.
“성지원? 저 여자도 왔네?”
‘성지원'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오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지원에게로 쏠렸다. 연보라색의 드레스를 입고 옅은 화장을 한 그녀의 달걀형 얼굴은 빛이 날 정도로 눈이 부셨다. 게다가 긴 치맛자락 사이로 늘씬하고 곧은 다리가 언뜻언뜻 보이니 숨이 멎게 할 만큼 압도적으로 아름다웠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부잣집 딸들의 존재감을 순식간에 억눌러 버렸다.
그런 성지원을 본 진유미와 조가현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매번 파티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성지원의 등장이었다. 아무리 공들여 치장하고 준비했어도 성지원이 등장하는 순간 들러리로 변하니까.
옷을 갈아입고 온 남희수도 성지원을 보고서는 질투심에 비꼬며 말했다.
“어머, 문정우한테 차인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뻔뻔하게 이런 파티에 오는 거래?”
그러자 옆에 있던 조가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희수야, 그만해.”
이때 어느 한 남자가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해성의 제일가는 재벌가 딸이라니까. 등장만으로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압도하네.”
곧이어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조소 섞인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예쁘긴 예쁘지. 근데 버림받은 여자잖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진유미의 오빠이자 진형문의 아들, 진유준이었다. 진유준의 목소리는 다소 크게 들려왔던지라 성지원마저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랬으니 당연히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다 들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전부 말을 꺼낸 진유준에게로 향하자 진유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모르겠지만 성지원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문정우 침대에 올라간 여자예요. 문정우한테 버림받은 이유도 질렸으니까 그런 거죠.”
이내 옆에 있던 재벌가 아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비아냥거렸다.
“저런 여자라도 마음에 들면 버린 걸 다시 주워보던가요.”
그러자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놓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해성에서 제일가는 재벌가 딸이 이런 여자였을 줄은 몰랐네요. 이렇게나 문란한 여자를 누가 데리고 살겠어요?”
그 말을 들은 다른 남자들도 성지원을 향한 호감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여자가 꼭 순결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알 정도로 문란한 여자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세상 어느 남자가 자신의 아내가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그런 여자라면 밖에 데리고 나가기도 창피했다.
남자들이 하는 말을 들은 성지원은 안색이 점차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진유준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을 최선을 다해 억눌렀다.
‘세상에 저딴 비열한 인간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지금 성지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조심스럽게 하도하를 보았다. 하도하는 그녀를 등진 채 전화를 받고 있었고 이쪽의 상황을 알지 못한 듯했다. 성지원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나 고개를 돌리자 이연자와 눈이 마주쳐 다시 긴장하게 되었다.
‘망할 진유준...'
이때 또 진유준의 뒤에서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경멸과 조소가 섞여 있었다.
“진유준, 내 기억이 맞는다면 성지원이 너한테 사촌 동생일 텐데, 그런 동생을 이런 식으로 모욕하다니.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든 거냐? 그리고 남자라면 입 좀 다물고 살아. 여자들을 보면서 이리저리 입을 나불대지 말고. 남자들 망신 네가 다 시키고 있으니까.”
남자의 말에 진유준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남자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넌 누구야! 뭔데 남의 일에 참견이야!”
최예성은 진유준을 마치 하찮은 개미 보듯 차갑게 보았다.
“너 따위가 내 이름을 알 자격 없어.”
그 한마디에 진유준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만약 이곳이 하씨 가문의 저택이 아니었다면, 하도하가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이미 주먹을 내리꽂았을 것이었다.
이때 최예성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를 내는 진유준을 무시한 채 전화를 받은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최예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성지원은 그런 그를 보며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꼭 어디서 본 것 같았지만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최예성은 성지원을 몇 초간 뚫어지게 보다가 이내 빠르게 떠나버렸다. 진유준은 그런 최예성을 보며 씩씩대며 말했다.
“하, 도망 안 갔으면 내가 오늘 진짜 죽여버렸을 거야.”
그러자 누군가 진유준을 비웃듯 말했다.
“진유준, 방금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 최예성이라고. 급한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은데 안 갔으면 오늘 넌 제대로 망신당했을 거야!”
진유준은 바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최예성? 방금 그 사람이 최예성이었어! 그래서... 그래서 낯익은 기분이 들었구나. 하나도 안 변했네. 여전히 날 잘 챙겨주는 든든한 오빠야.'
성지원은 오늘 이 파티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던지라 시선을 거두고 이연자를 향해 단호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 파티에 아무리 여자가 많다고 한들 품격이 없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