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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결혼 3년 차. 이해는 심이연과 유현준이 가장 처절하게 맞붙은 해였다. 결혼기념일 당일, 심이연은 체내에 남은 정액을 증거로 제출하며 유현준을 경찰에 고발했다. “안녕하세요, 유현준을 강간죄로 신고합니다. 제 의사를 무시한 강제 관계였어요!” 경찰서에 앉아 있는 유현준은 완벽한 수트 핏을 자랑하며 손가락 사이로 담배 연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구속된 처지임에도 그는 여전히 모든 상황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둔 듯 여유로워 보였다. 그때 경찰 한 명이 다가오더니 법조계의 저승사자라 불리는 유현준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입을 열었다. “유 변호사님,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고 싶으십니까?” 심이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유현준을 처벌하려는 게 아니라, 그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를 묻고 있었다. 유현준이 눈매를 가늘게 뜨며 매혹적으로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의 턱을 치켜들었다. “이연아, 나를 무너뜨리려고 정말 독하게 마음먹었네. 그런데 어떻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할 수 있어? 침대에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써가며 나랑 미친 듯이 즐길 때는 이렇게 매정하지 않았잖아.” 남자의 팔에 강한 힘이 실리며 심이연을 제 곁에 단단히 가두었다. 심이연은 벗어나려 발버둥 치며 경찰들을 향해 분노 섞인 목소리로 따졌다. “이 사람이 제 자유를 억압하고 감금하고 있는데 보고만 있을 건가요?” 남자가 자신의 셔츠 깃을 풀어헤치자 목덜미를 가득 채운 야릇한 키스 마크들이 드러났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부부 사이의 애정 행각인데 경찰들이 어떻게 관여하겠어? 네가 강요라고 주장해도 이 흔적들은 거짓말을 안 하잖아. 이것도 내가 시켰다고 우길 거야?” 경찰들은 난처한 듯 고개를 숙였지만 유현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속한 말을 이어갔다. “착하지, 이제 화 풀어. 어젯밤 서비스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어? 매정한 사람. 밤새 그렇게 매달려 놓고 해 뜨니까 바로 남 보듯 하네. 뭐, 어쩌겠어. 내가 네 남편인데. 이 정도 응석은 다 받아줘야지.” 그의 가식적인 행동은 누가 봐도 심이연을 끔찍이 아끼는 남편 그 자체였다. 경찰들은 이제 심이연이 질린다는 듯 문을 열어주며 어서 나가라는 눈치를 주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지난 3년 동안 심이연은 유현준을 36번이나 고소했지만 매번 증거 부족으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온 서울이 유현준이 심이연에게 미쳐 있다는 것을 아는데 오직 심이연만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매달 소동을 피우는 꼴이었다. 유현준에게 끌려나가며 심이연의 눈동자에선 마지막 희망의 빛마저 사라졌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옷깃을 파고들자 유현준은 세심하게 자신의 코트를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돌아가는 길, 심이연의 귀에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비수처럼 꽂혔다. “집안 망하고 갈 곳 없는 여자 거둬준 유 변호사가 불쌍하지. 대체 뭐가 잘나서 매번 저렇게 유난을 떠는 건지 원.” “역시 여자들은 까탈스럽다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이연의 눈가에서 참지 못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벌써 3년째, 그녀는 매번 이혼을 계획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유난을 떤다느니 괜히 소동을 피운다느니 손가락질했지만, 누구 하나 그녀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사실 그녀와 유현준의 시작은 더없이 달콤했다. 그녀가 별을 원하면 그는 절대 달을 주지 않는 남자였고 수박을 먹을 때면 늘 가장 달콤한 가운데 부분을 그녀에게 먼저 내어주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그녀를 위해 밤이 되면 그는 단 한 발자국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고 심지어 심이연이 밤길을 걷다 겁에 질리는 일이 없도록,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서울 전역의 가로등을 가장 밝은 조명으로 교체해 버리기까지 했다. 결혼식 당일, 그의 첫사랑인 엄하설이 이혼하고 귀국해 갈 곳이 없다며 매달렸을 때조차 유현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미안, 나 결혼했어.” 심이연은 자신이 선택한 남자가 옳았다고 굳게 믿었건만 현실은 가혹하게 그녀의 뺨을 때렸다. 다음 날 아침, 엄하설이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경찰서에 나타나 심이연의 아버지 심태우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사건은 수리되었고 심태우는 구속되었다. 심원 그룹의 주가는 폭락했고 심이연의 어머니 김미숙은 갑작스러운 뇌경색으로 ICU에 입원했으며 인터넷은 온통 심태우를 비난하는 글로 도배되었다. 심이연은 울면서 법조계의 불패 신화인 유현준에게 공정을 기해달라고,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달라고 애원했다. 유현준은 애틋하게 그녀를 감싸 안으며 다짐했다. “이연아, 걱정 마. 장인어른 일이니 내가 반드시 책임질게.” 심이연은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재판 당일, 유현준은 그녀의 맞은편에 서서 엄하설의 변호인이 되어 심태우가 엄하설의 방으로 들어가는 영상 증거를 법정에 제출했다. 그는 심이연의 대척점에 서서 가장 잔인하고 독한 말로 심태우를 비판했고 결국 심태우는 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 바람에 겨우 ICU에서 고비를 넘겼던 김미숙은 다시 혼수상태에 빠져 생명이 위독해졌다. 그날 밤, 심이연은 집안의 물건을 모조리 때려 부수고 그들의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모든 것을 태워버린 뒤 울부짖으며 그를 추궁했다. “유현준, 우리 아빠야. 당신 자라는 걸 평생 지켜보신 분인데 어떤 사람인지 몰라?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하냐고!” 무너져 내린 심이연과는 대조적으로 유현준은 마치 제삼자처럼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이연아, 법은 정의로운 자의 편이야.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지, 네 아빠라고 예외는 없어. 잘못한 건 네 아빠야. 왜 돕지 않았냐고 나를 탓할 게 아니라, 왜 그런 추잡한 짓을 저질렀는지 네 아빠한테 물어봤어야지. 게다가, 하설이가 나 때문에 이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공정하게 조력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 남자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정곡을 찔렀다. 마치 사적인 감정 따위는 전혀 없으며 오로지 정의만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심이연은 정신이 나간 듯 오열하며 절망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물었다. “그럼 나는? 나는 당신 아내잖아. 당신은 내가 죽든 살든 상관없다는 거야?” 유현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안쓰러운 듯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연아, 아버님 일은 너와 상관없는 일이야. 넌 여전히 내 아내고. 네 면목을 봐서라도 5년 형이 끝나면 내가 같이 아버님을 모시러 갈게.”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심이연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고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겐 이제 집이 없었다. 그녀의 가정은 파괴되었고 그것을 부순 것은 바로 유현준이었다. 결국 김미숙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투신자살했다. 심원 그룹은 파산했고 심이연은 수십 조의 빚을 떠안았으며 심씨 가문은 순식간에 몰락해 사람들의 안줏거리로 전락했다. 그렇게 한때 서울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던 명주는 결국 먼지에 뒤덮이고 말았다. 이후 유현준과 이혼하기 위해 심이연은 직접 유성 그룹의 기업 비밀을 경쟁사에 넘겼다. 유성 그룹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주주들은 앞다투어 심이연에게 법적 책임을 물으라고 요구했지만, 유현준은 홀로 그 모든 압박을 감내하면서도 끝내 이혼만은 거부했다. 그렇게 꼬박 3년 동안 심이연은 그와 헤어지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그녀가 해외로 도주하자 유현준은 대사관에 아내가 실종되었다고 연락하며 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잡아들였다. 돌아온 그녀의 손목에 강제로 전자 팔찌를 채웠지만 심이연은 칼을 휘둘러 그것을 끊어버렸고 유현준은 그녀가 제 몸에 상처를 낼 때마다 감옥에 있는 심태우의 몸에도 똑같이 칼자국을 내겠다며 협박했다. 김미숙이 세상을 떠난 뒤 심태우는 심이연의 유일한 혈육이자 단 하나뿐인 약점이었다. 결국 심이연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숨이 막혀 미칠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시선 속에서 유현준은 심이연에게 미친 순정남에 불과했다. 매일 그녀의 뒷수습을 하고 심씨 가문의 20조가 넘는 빚까지 대신 갚아주었으니 심이연이 대체 왜 저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다들 이해하지 못했다. 심이연 스스로조차 정말 자신이 유난을 떠는 건지 의구심이 들 무렵, 유현준은 엄하설을 비서로 채용했다. 그날 유현준은 아주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하설이는 이혼하고 서울에 연고도 없어. 게다가 지난번 사건으로 충격이 커서 우울증까지 앓고 있으니 내가 책임져야 해.” 그때부터 유현준과 엄하설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심이연이 고열에 시달리는 밤이면 엄하설은 어김없이 몸이 아팠고 유현준은 아내를 외면하며 말했다. “이연아, 난 지금 너희 집안의 죄를 대신 갚고 있는 거야.” 그녀가 유산의 고통 속에 몸부림칠 때, 엄하설은 유현준을 붙들고 전 세계를 누비며 여행을 즐겼다. 하지만 유현준의 모든 행동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것인 양 보였다. 세상은 유 변호사가 지독한 애처가라고 떠들어댔지만, 정작 심이연이 본 것은 엄하설을 위해 매번 아내를 사지로 몰아넣는 악마였다. 장장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심이연의 몸과 마음은 처참하게 망가졌고 매일 밤 자해로 고통을 달래야 했다. 그녀는 유현준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이혼해줘. 제발. 안 그러면 나 정말 죽어.” 유현준의 얼굴에 잠시 당혹감이 스쳤으나, 그는 이내 고집스럽게 그녀를 껴안았다. “이연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이혼은 절대 안 돼. 네가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야. 우리 사이에 이혼이란 없어. 오직 사별뿐이지.” 심이연은 몇 번이고 죽음을 꿈꿨지만, 유현준은 24시간 감시를 붙여 단 한 번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팔뚝에 새겨진 상처가 늘어갈수록 그녀는 매일 죽음의 날짜를 세었다. 이 육체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날,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얻으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엄하설의 끊이지 않는 도발은 결국 그녀를 폭발하게 만들었고 심이연은 사람을 고용해 그녀를 납치했다. 엄하설의 행방을 묻기 위해 유현준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손을 댔다. 그것도 모자라 엄하설의 화풀이를 대신하듯 감옥에 있던 심태우를 초주검으로 만들어 병원으로 보냈다. 그러고는 심이연에게 경고했다. “다시는 엄하설을 건드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리고 떠날 생각 따위는 꿈도 꾸지 마.” 세상은 그들이 영원할 거라 믿었지만 심이연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직감했다. 의사는 그녀의 상태가 우울증을 넘어 신체화 증상과 정신 질환까지 동반하고 있다며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완전히 미쳐버릴 것이라 경고했다. 유현준이 엄하설의 곁을 지키는 밤마다 그녀는 방 안에 숨어 자해를 반복했고 낫지 않은 흉터 위에 다시금 선명한 핏자국을 새겼다. 결국 심이연은 그를 유혹하기로 했다. 강간의 증거를 잡아 이 지옥 같은 결혼생활을 끝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는 그저 그가 없는 곳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과거의 기억들이 심장을 옥죄어 오자 그녀는 마지막 구원이라도 바라는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유현준, 제발 부탁이야. 우리 이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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