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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그때 유현준이 돌연 걸음을 멈췄고 심이연은 그의 등에 코를 박았다. 찡한 통증과 함께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녀는 아픔을 참고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차가운 강풍에 흩날린 머리카락이 그의 눈 앞을 가렸지만 심이연은 그 틈새를 뚫고 나오는 유현준의 서늘한 분노를 단번에 읽어냈다. 결혼생활 3년 동안 그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낸 건 두 번째였다. 남자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인내심이 바닥난 듯 물었다. “그렇게까지 이혼하고 싶어?” 그동안 그녀가 이혼을 입에 올릴 때마다 웃어넘기던 그였다. 하지만 이번엔 그도 정말 귀담아들은 모양인지 꽤 진지하게 물었다. 심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재판 당일 당신이 내 반대편에 섰던 그 날부터 우리 결혼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어.” 그 말에 유현준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차갑게 냉소했다. “좋아, 원하는 대로 해주지.” 유현준은 조금의 다정함도 없이 심이연을 거칠게 잡아채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한 시간 후, 두 사람은 법원에서 이혼 합의서에 서명했다. 직원이 안내하기도 전에 유현준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30일의 숙려 기간이면 충분히 진정되겠지? 그동안 머리에 찬물 좀 빼고 정신 차려. 심이연, 작작 좀 해. 나도 이제 슬슬 짜증 나니까.” 심이연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혼하고 싶었지만, 유현준의 눈에는 그저 관심을 끌기 위한 생떼로 보일 뿐이었다. 남자의 독설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평소에 오냐오냐해주니까 앞뒤 분간이 안 되나 본데, 이제 나도 널 달래줄 이유를 모르겠어. 분수도 모르고 설쳐대니 나도 진저리가 나.” 말을 마친 유현준은 정장을 챙겨 들고 오만한 자세로 법원을 나서며 덧붙였다. “내일은 상장 기념 파티야. 그 죽상 같은 얼굴로 나타나지 마.” 남자가 떠나자 직원들은 동정 어린 시선으로 심이연을 바라보았다. 심이연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유현준, 이번엔 정말 끝이야. 반드시 이혼하고 말 거야.” ... 이혼 숙려 기간은 30일이었다. 심이연은 30일 뒤에 떠날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명의로 된 부동산도 전부 처분했다. 과거에 유현준은 그녀가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여러 채의 집을 선물로 주었었다. 이제 떠나기로 결심했으니 이런 물건들도 모두 매각하는 게 맞았다. 심이연은 짐을 정리해 캐리어를 끌고 먼저 집을 나갈 준비를 마쳤다. 별장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유현준이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등장이었다. 보통 이맘때면 유현준은 아픈 엄하설의 곁을 지키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유현준은 그녀의 손에 들린 캐리어를 차갑게 내려다보더니, 눈빛을 가라앉히며 발로 캐리어를 걷어찼다. “심이연, 작작 좀 해. 이런 식으로 관심 끌면 재미있어?” 심이연은 이것이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 정말 그를 떠나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의 고집스러운 안색을 보니 말해봤자 믿지 않을 게 뻔했다. 지칠 대로 지친 심이연은 그저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다시 캐리어를 집으려 몸을 돌렸다. 하지만 유현준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며 서늘하게 위협했다. “지금 나가면 네 아버지 2심 항소는 포기하겠다는 뜻이야? 심이연, 이 사건은 내가 맡고 있어. 내가 한마디만 하면 서울의 어느 로펌이 감히 이 사건을 맡을 것 같아?” 남자의 낯선 모습에 심이연은 전신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야?” “어.” 남자의 대답은 간결하고도 명확했다. 심이연의 눈물이 야속하게 차올랐다. 지난 3년 동안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그녀는 온갖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머리를 조아렸다. 심지어 변호사를 구하려 상대의 발 앞에 무릎까지 꿇었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건이라는 걸 알자마자 다들 독사라도 본 듯 피했고 나중에야 자신이 법조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그저 사람들이 유현준의 눈치를 보느라 거절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유현준이 직접 그녀의 앞길을 모조리 끊어놓았다는 것을. 심이연은 주먹을 꽉 쥐었고 핏발 선 눈은 섬뜩할 정도로 붉어졌다. “유현준, 예전에 유성 그룹이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신 집안을 도와준 건 우리 아빠였어. 그런데 이제 와서 은혜를 이따위로 갚아? 그때 앞뒤 가리지 않고 아빠를 몰아넣더니, 이젠 마지막 살길까지 막아버리겠다고? 유현준, 우리 가족을 전부 죽여 없애야 네 속이 시원하겠어!” 심이연은 숨이 넘어갈 듯 오열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유현준이 그녀를 붙잡으려 다가갔지만 심이연은 거칠게 그를 뿌리쳤다. “만지지 마, 더러우니까!” 유현준의 안색이 그 한마디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래, 전부 내가 한 짓이야. 이연아, 넌 이제 열여덟이 아니라 스물여덟이야. 그만 좀 순진하게 굴어. 내 허락 없이 서울 땅 어느 변호사가 감히 네 사건을 맡을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더 이상 소란 피우지 않겠다고 약속만 하면 네 아버지 재판은 내가 책임질게.” 심이연은 눈물범벅이 되어 오열했다. 3년 전에도 유현준은 똑같이 말했으나 재판 당일 그녀의 뒤통수를 쳤었다. 하지만 이번엔 모든 퇴로가 유현준에 의해 철저히 막혀 있었다.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서로의 치명적인 약점이 어디인지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심이연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던 유현준은 다가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연아, 약속할게. 내 곁에 얌전히만 있어 주면 아버님 2심,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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