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1화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안이는 살해를 당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육민관은 손가락을 잃었다. 게다가 약물까지 주입을 당하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지.’
“준, 나를 못 믿겠어?”
백지안인 창백한 얼굴로 불쌍한 척하며 하준을 올려다보았다.
하준은 물끄러미 지안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인가? 이제는 사랑하지 않더라도 제대로 보호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제는 지안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겠어.
그런 느낌은 사실 곽철규의 존재를 알았을 때 한번 받았지.
그리고 이번에는 나랑 여름이의 감정이 좋았을 때 갑자기 지안이가 납치당했고 모든 것이 바뀌었어.
지안이 남매만 아니었으면 난 육민관의 손가락을 자르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이 소송에 휘말리지도 않았을 거야.
이 모든 것이 정말 지안이가 직접 계획한 거라면…’
하준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네 사건은 이제 경찰로 넘어갔으니까 납치범들은 경찰에서 찾아줄 거야. 너와 난 이미 헤어진 사이니까 이제 다시는 날 찾지 마.”
하준은 고개를 숙이고 말을 마치더니 그대로 걸어 나가버렸다.
백지안이 하준의 팔을 와락 잡더니 울부짖었다.
“다른 사람이 다 날 의심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우린 20년을 알았는데 네가 날 안 믿어 주면 난 어떡해? 내가 무슨 수로 저렇게 힘이 좋고 우락부락한 육민관을 납치해? 육민관의 격투 실력은 다른 사람을 한참 뛰어넘는 수준인데. 난 육민관을 다른 사람이 납치해 왔는지도 몰랐어. 눈을 떠보니까 그냥 그 인간이 보였던 것뿐이야.”
“그래.”
백윤택이 다급히 말을 받았다.
“나도 평소에 양아치들하고 어울리기는 해도 그래 봐야 건달이지, 약쟁이는 알지도 못한다고. 그런 놈들은 필시 조직에 있는 놈들일 거야. 그런 놈들이 이제 지안이를 건드리면 어떡해?”
백지안은 ‘어이구 이번에는 어쩐 일이야?’라며 칭찬하는 시선으로 백윤택을 쳐다봤다.
백지안 남매가 난리를 치며 떠들어 대니 골치가 아팠다.
이렇게 짜증스러운 기분은 처음이었다. 공중에 붕 뜬 것처럼 무력하고 두려웠다.
특히나 여름이 법정에서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미칠 듯이 초조해졌다.
“한동안은 널 보호할 사람을 붙여줄게. 하지만 나에게 연락은 하지 말아줘.”
하준은 백지안의 손을 뿌리쳤다.
“너랑 헤어질 때 집에, 차에, 현금까지 전부 넉넉하게 주었잖아. 그리고 백윤택, 내가 그 오랜 세월 영하를 이끌어 주었고 그 여러 번을 구해줬으면 이제 난 당신들에게 빚은 없는 셈이야.”
백지안의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가셨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하준은 더 이상은 백지안에게 관심을 줄 여력이 없었다. 너무 피곤했다. 백지안과 자신의 굴레가 여름과 자신이 어렵게 쌓아 올린 애정을 완전히 망가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네가 죽고 사는 것을 나와 연관시키지 마.”
그렇게 한 걸음씩 뒷걸음질을 치던 하준은 휙 돌아서 여름을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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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와 여름이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준은 성큼성큼 여름을 향해 급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미처 가까이 가기도 전에 양우형이 하준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 여름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
하준은 급히 여름 쪽을 돌아보았다. 겨우 며칠 사이에 무척 야위어 있었다. 눈에는 핏발이 가득했고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육민관 사건의 증거를 잡느라고 내내 잠도 못 잔 탓이리라.
하준은 심장이 아릿했다.
‘이게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여름이를 조금만 믿어 주었더라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윤서가 비아냥거렸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나 같으면 얼굴 들고 근처에도 못 왔을 텐데. 우리 여름이에게 상처 줄 때는 그렇게 파도 눈물도 없는 독사같이 굴더니 이제 오해가 풀리니 또 들러붙고 싶은 가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