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화
여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하준의 조심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우스웠다.
여름의 사뭇 매정한 말투로 비꼬았다.
“아무렴 내가 당신을 보러 왔겠어?”
여름은 힘껏 하준의 손을 뿌리쳤다.
“우린 이제 서로 아무 사이도 아니야.”
여름이 돌아서서 가려고 하자 하준이 얼른 여름의 앞을 막아섰다. 아프면서도 목소리는 예전처럼 카리스마가 넘쳤다.
“내가 언제 너랑 헤어진다고 했나? 강여름, 넌 여전히 내 애인이야.”
“저기요, 기억력이 많이 떨어지시네. 어제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보니까 백지안이랑 아주 철석 붙어있던데.”
강여름은 하준의 파렴치함에 치를 떨었다.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았어도 그딴소리 못할 것 같은데.”
“날… 수치심도 없는 인간으로 보는구나.”
하준은 고통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손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많은 일을 잘못한 건 알아. 아마도 김 실장 말처럼 나는 여름이를 귀찮게 하면 안 되는지도 몰라. 하지만 어제부터 지금까지 난 여름이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사람은 아플 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진다는 말이 있지.
하지만 내가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아.’
“미안해. 나도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 그날 지안이를 구하러 갔을 때 내가 직접 육민관이 지안이를 마구 때리는 모습을 보고 그만….”
“백지안 때문에 얼마나 분노했었는지 같은 쓰잘데기 없는 소리 나한테 하지 마. 듣고 싶지도 않아.”
여름은 한 마디로 하준의 말을 끊었다.
“전에 혹시나 해서 했던 말이 맞아. 난 복수하려고 당신과 사귀겠다고 한 거야. 백지안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는 고통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어.”
“뭐라고?”
하준은 멍해졌다. 누군가에게 세게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왜 그럴 리가 없어?”
여름이 싸늘하게 웃었다.
“대체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하나하나 불러줘? 첫째, 백지안이랑 바람이 났었지. 그런데도 사람들이 백지안에게 불륜녀라고 손가락질할까 봐 우리 아버지를 볼모로 잡고 나에게 이미 이혼했다고 발표하라고 했었지. 그때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알아?
둘째. 백윤택이 윤서에게 폭력을 폭력을 휘둘렀을 때 어떻게든 백윤택을 구해주려고 했었지. 그건 내 심장에 대못을 박는 일이었어. 결국 백윤택은 풀려났고, 언론 플레이로 윤서의 평판만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어.
셋째, 날 감금했지. 그리고 내가 낳은 아이를 백지안에게 키우게 하겠다고 했어.
넷째. 유산하게 만들었지.
다섯째. 내가 정신병이 있다며 날 정신병원에 가두어 두었어. 거기서 매일 주사를 맞고 약을 먹었어. 아무리 아무 병이 없다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
여섯째, 내가 가짜 죽음을 가장한 뒤에 우리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신 유일한 회사를 백지안에게 관리하도록 했어. 당신이 가진 그 수많은 회사를 두고 왜 굳이 화신을 백지안의 손에 쥐여준 거야?”
여름은 말을 할수록 분노가 차올라 흥분했다. 눈에는 증오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하준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여름이의 분노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구나.
그러면 전에 나에게 보여준 미소와 애정이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마음이 너무 아파서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아니면 수술 때문인지 툭 건드리면 당장 쓰러질 것처럼 약해 보였다.
여름은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비웃었다.
“이건 예전 거고, 이제 내가 돌아온 뒤에 거 얘기해 볼까? 첫째. 백지안 말 몇 마디에 이사진들이 날 압박하게 만들었어. 내가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면 화신은 당신 손에 도산하고 말았을 거야.”
“둘째, 백지안의 약물에 당했을 때 나한테 와서 풀었어. 끝나고 나서는 당신 아이라도 가졌을까 봐 사후 피임약을 쓰도록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