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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화

하준은 한동안 기다렸는데도 여름에게서 아무런 답이 없었다. 하준은 실망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과 관계를 끊겠다고 했지만 두 사람이 뭔가를 주고받고 있다면 최소한 여름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의미지만 이렇게 아무 소식이 없다는 것은 이제 철저히 무시하겠다는 의미였다. 무시당하는 맛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하준은 휴대 전화를 던지고 일어섰다. 상처가 새삼 아팠다. 상혁도 울고 싶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은 채로 특별히 퇴원을 받으셨는데 조심하셔야죠.” “본가에 가야겠어.” 상혁은 한숨을 돌렸다. 강여름을 찾아가겠다는 것만 아니면 지난번처럼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고열에 시달리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참, 여울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좀 사다 줘.” 하준이 말했다. 상혁은 움찔했지만 곧 끄덕였다. ‘연애에 열을 올리시느니 딸이랑 놀아주시는 게 백 번 낫지.’ ---- 오후 5시, 최양하는 유치원에서 여울을 받아 데리고 왔다. 여울은 솜사탕을 들고 깡총거리며 들어오다가 휠체어에 앉은 하준을 보고 그대로 멈춰 섰다. “큰아빠, 왜 그래요?” “큰아빠가 수술을 했어. 수술 자리가 아물기 전에는 걸어 다니면 안 된대.” 하준이 부드럽게 말했다. “큰아빠 불쌍하다.” 여울은 마음이 아팠다.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친아빠가 아닌가. “여울이가 호~ 불어줄까요?” “괜찮아. 많이 나았단다.” 하준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가 여름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좀 사 왔는데. 상혁이 삼촌이 네 놀이방에 가져다 놨다. 주방놀이, 화장대 놀이 이거저거 사 왔어.” “와, 신난다! 고맙습니다, 큰아빠!” 여울은 기뻐서 팔짝팔짝 뛰었다. 그러나 꼬맹이는 곧 멈추었다. “아니, 엄마가 선물 막 받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 최양하가 고소하다는 듯 웃었다. “엄마 말씀이 맞지. 사람들이 바라는 거 없이 선물을 해주지는 않거든.” “최양하….” 하준의 싸늘한 시선이 최양하를 향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최양하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 후회가 되시죠.? 하지만 후회해 봐야 소용없을걸요. 상처받은 사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법이에요. 그리고…육민관은 여름 씨에게 엄청나게 소중한 사람이었는데….” 하준은 휠체어 손잡이를 꽉 잡았다. “네가 여름이 출국을 도왔으니 육민관과 여름이 사이도 잘 알겠구나. 얘기 좀 해줄래?” “제가 몰래 출국시켜준 일로 절 미워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최양하가 웃었다. “그때 얼마나 세게 날 쳤던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만….” “……” 하준의 미간에 괴로운 기색이 보였다. ‘그래, 그랬었지. 이거 내가 양하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건가? 여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하준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전에는 내가 너무 흥분했었지. 내가 너에게 잘못했다는 걸 인정한다.” ‘그때는 내가 여름이를 사랑하지 않았지. 하지만 지금 되돌이켜 보니 여름이가 죽었더라면 난 지금쯤 살아도 산 게 아니었을 거야.’ 최양하는 놀라서 하준을 흘끗 쳐다보았다. 하준이 정말 사과를 할 줄은 몰랐다.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 아냐?’ “뭐 어쩔 수 없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육민관과 양우형은 D국 빈민가 출신입니다. 먹고 살려고 어려서부터 조직 생활을 했어요. 하지만 계속 범죄나 저지르게 되자 둘은 조직을 벗어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조직에서 둘을 쫓았죠. 2년 전에 여름 씨가 마침 둘을 구해주었어요. 대신 자기를 5년 동안 따르라고 했죠. 두 사람은 이후로 여름 씨에게 충심을 다하면서 오른팔, 왼팔이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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