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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진이서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침대맡 서랍으로 기어가 떨리는 손으로 챙겨둔 항알레르기약을 입에 밀어 넣었다. 약효가 보이자 진이서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얼굴은 눈물과 땀, 그리고 두드러기로 엉망이었다. 그 뒤로 며칠간 이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진이서는 강예슬의 인스타에서 이준서의 행방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강예슬에게 개인 주치의를 소개해 주는가 하면 함께 전시를 보러 다니고 한정판 주얼리를 선물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예슬의 생일이 되었다. 이준서는 강예슬이 그림을 좋아하는 걸 고려해 솜씨가 볼품없는 걸 알면서도 거금을 들여 개인전을 열어줬다. 출발하기 전 강예슬은 일부러 진이서 앞으로 다가가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서 씨. 오늘 개인전을 여는데 꼭 보러와요. 그동안 챙겨준 게 고마워서 그래요.” 진이서가 아무 표정 없이 손을 빼며 말했다. “나는 관심 없어요.” 강예슬이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짓자 지켜보던 이준서가 얼굴을 굳히며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 “좋은 뜻으로 초대하는데 뭐가 대단하다고 거절이야? 좋은 분위기 깨지 마.” 진이서는 쓸데없는 일로 싸우기 싫어 결국 조용히 두 사람을 따라 갤러리로 향했다. 갤러리에는 강예슬의 촌스럽고 후진 그림들이 멋들어진 액자에 담겨 있었다. 코너를 도는데 진이서의 귀에 예술 평론가처럼 보이는 남자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토론하는 게 들렸다. “이 대표는 돈도 많아. 이런 실력으로 무슨 개인전이래?” “쯧. 애인 기분 생각해서 그러는 거지. 옆에 있는 여자 안 보여?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애지중지하잖아. 와이프는 장식품이네.” 강예슬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자마자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준서야... 나 때문에 너까지 안 좋은 소리 듣게 해서 미안해. 내 그림 너무 볼품없지?” 이준서가 바로 위로했다. “헛소리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얼마나 예쁜데.”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갤러리에 사람이 대거 몰려와 강예슬의 그림을 놓고 너도나도 사겠다고 나서며 두 번 다시는 없을 작품,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한 필촉이라고 칭찬을 해대기 시작했다. 강예슬은 그제야 눈물을 그치고 활짝 웃었다. 진이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몰려온 바이어와 추종자들은 대부분 시안 그룹 직원이나 임원이었다. 이준서가 강예슬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짠 작전인 것 같았다. 진이서는 문득 이씨 가문으로 들어갔던 해에 고열을 앓았던 게 떠올랐다. 마침 도우미들도 자리를 비우고 없어 허약한 몸을 이끌고 이준서의 방으로 기어가 약이 있는지 물어보며 가정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10살밖에 안 된 이준서는 진이서를 힐끔 쏘아봤다. 예쁘지만 초점 없는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곧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진이서는 그때 느꼈던 냉대와 실망을 똑똑히 기억했다. 사실 이준서는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이 진이서를 향해 뛰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때 갤러리에서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화재 경보음이 들려왔고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이야.” 누군가 힘껏 비명을 질렀다. 현장은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고 당황한 사람들이 일제히 출구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강예슬은 소리를 지르며 이준서의 품에 안겼다. 이준서는 그런 강예슬을 품에 안고 몸으로 붐비는 사람들을 막으며 신속하게 안전 출구로 향했다. 너무 서두른 탓인지 이준서는 팔꿈치로 겨우 중심을 잡는 진이서를 밀쳤고 진이서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진이서가 다시 일어나기도 전에 위에서 듣기만 해도 소름이 쫙 끼치는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장식용으로 덧댄 대들보가 그대로 무너졌다. 무거운 목재가 다리를 짓누르자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고통이 진이서를 덮쳤다. 의식이 흐릿해져 가는데 안전 구역으로 물러선 강예슬이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하는 게 들렸다. “준서야. 진이서 씨 넘어진 것 같은데...” 곧이어 이준서의 매정한 목소리가 여러 소음을 뚫고 진이서의 귀를 파고들었다. “아니. 전에 말했잖아.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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