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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진이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침대맡에 앉은 강예슬이 느긋하게 사과를 깎고 있었다. 진이서가 눈을 뜨자 사과를 내려놓은 강예슬이 관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서 씨. 깼어요? 몸은 어때요? 다 내 탓이에요... 당시 상황이 급하기도 하고 준서가 나를 구한다고 이서 씨에게 신경을 별로 못 쓴 것 같아요... 그래도 너무 뭐라고 하지는 말아요.” 진이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 우리 두 사람밖에 없는데 착한 척 좀 그만해요. 피곤하지 않아요? 내 생각이 맞다면 할머니 유품도 일부러 떨어트린 거죠. 단팥죽도 다 쇼였잖아요. 갤러리 화재도 사람 시켜서 방화한 거고.”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엾기만 하던 강예슬의 표정은 음모를 들킨 사람이 지을 법한 경멸과 조롱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멍청한 건 아니네요. 맞아요. 다 내가 꾸민 짓이에요. 그냥 보여주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준서에게 진이서 씨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준서가 마음에 품은 사람은 나예요. 싫어하는 거 알면서 왜 염치도 없이 사모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거예요? 처량하지도 않아요? 차라리 빨리 이혼하는 게 서로에게 좋아요.” 눈을 뜬 진이서가 평온한 표정으로 천정을 올려다보며 아무 기복이 없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진이서의 뜻은 절차를 밟고 있으니 곧 떠난다는 말이었지만 강예슬은 진이서가 닥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영혼 없이 대꾸하는 거라고 생각해 얼굴이 굳어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꼭 좋은 말로 하면 못 알아듣더라고요? 화나게. 대가는 곧 치르게 될 거예요.” 그러더니 콧방귀를 뀌고는 가방을 챙겨 또각또각하는 소리를 내며 병실을 나섰다. 진이서는 따라갈 힘도 설명할 의욕도 없어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진이서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상관이 없었다.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 며칠간 이준서와 강예슬은 나타나지 않았다. 덕분에 진이서도 조용한 환경에서 시름 놓고 몸조리할 수 있었다. 퇴원하는 날 중요한 자선 파티가 있는데 가족과 동반 참석해야 했다. 비록 내키지 않았지만 진이서는 이씨 가문 안주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이행해야 할 의무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 점잖은 드레스로 갈아입은 진이서는 옅은 화장으로 창백한 얼굴에 혈색을 더했다. 차로 가보니 강예슬이 뒷자리에 타서는 이준서의 어깨에 기대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진이서를 발견한 강예슬이 긴장한 듯 몸을 일으키더니 설명했다. “이서 씨, 오해하지 말아요. 준서가 파티 재미없다고 바람도 쐴 겸 같이 가달래요.” 이준서는 진이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뭐 하러 설명해? 내가 데려가고 싶은 사람 데려가는 거지. 진이서가 뭐라고 동의까지 받아?” 이 말은 칼처럼 진이서의 마음을 후벼팠다. 이미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잔잔한 아픔은 여전했다. 묵묵히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은 진이서는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휘황찬란한 경매장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준서는 강예슬의 허리를 감싸고 음료수를 가져다주거나 셀럽들을 소개해 주며 살뜰하게 챙겼다. 그러면서도 진이서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은 강예슬이야말로 이준서의 와이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경매가 시작되고 경매품이 올라올 때마다 이준서는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강예슬에게 물었다. “마음에 들어?” 강예슬이 눈길을 주거나 고개를 끄덕이면 이준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압도적인 가격으로 경매품을 손에 넣고는 이렇게 말했다. “선물이야.” 주얼리, 명화, 고대유물까지... 값비싼 선물이 강예슬 앞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씨 가문과 친분이 있는 어르신이 보다못해 이렇게 물었다. “준서야. 너무 강예슬 씨만 챙기면 이서가 화내는 거 아니야?” 이준서는 진이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술잔을 흔들며 차갑게 말했다. “무슨 자격으로 화내요. 내 돈인데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거지.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이 말에 강예슬이 우쭐거리며 진이서를 바라보더니 온갖 얌전한 척은 다 하며 이준서의 옷소매를 잡았다. “준서야. 너무 비싸... 이서 씨에게 조금만 나눠주면 안 돼?” 이준서는 그제야 진이서를 힐끔 쳐다보며 거리감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경고했다. 강예슬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기만 했다. “다 너를 위한 선물이야. 걱정하지 마. 아무도 뺏어가지 못해.” 분명한 태도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쯧쯧. 결혼 생활만 몇 년인데 와이프나 그렇게 신경 쓰지.” “그것뿐이겠어? 이 대표 태도 봐봐. 안주인 자리도 곧 뺏기게 생겼는데?” “처음부터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잖아. 억지로 붙여놓으면 뭐 해. 모양새만 우스워지지.” “청춘을 다 바쳤는데 아무것도 못 건졌네. 불쌍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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