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술

대서양 J국 카지노에서 죽을 치고 있던 박예리는 자신이 도박에 빠져 집에 있던 액세서리까지 훔친 일로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는 사실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다시 귀국하고 평소 친한 척하던 다른 재벌가 자제들이 그녀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때에야 박예리는 자초지종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쫓겨난 올케 소은정이 있었다니? 그렇게 한참을 벼르고 있던 박예리는 마침 레스토랑에서 소은정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바로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역시 소은정을 가난한 집안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는 바로 매니저를 호출했다. 그녀가 받은 치욕을 10, 100배로 갚아주리라 다짐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매니저가 부랴부랴 달려왔다. 하지만 그가 관리하고 있는 레스토랑은 모두 맴버십으로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는 예약제, 이곳을 찾는 손님들 중 그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박예리는 당장이라도 소은정의 뺨을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보는 눈들이 많이 그저 그녀를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저 여자 당장 내쫓아. 저 여자 때문에 밥맛이 떨어진다고! 우리가 누군지는 알고 있지?” 박예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매니저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저분은 SC 그룹의 대표 소은호가 아닌가? 그리고 그와 동행하고 있는 고급스럽고 청순한 외모의 여자는 박예리의 무례한 행동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매니저는 부랴부랴 달려가 소은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소 대표님, 오셨습니까? 예약하신 자리는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따라오세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박예리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비쳤다. 그리고 소은호의 잘생긴 외모에 또 한 번 흠칫 놀랐지만 소은정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바로 미간을 찌푸리더니 더 악을 쓰며 소리쳤다. “야! 내 말 안 들려? 저 사람들 당장 내쫓으라고!” 이민혜도 질세라 곁에서 거들었다. 그녀는 소은정의 차림새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소은정, 여긴 너 같은 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이번에는 또 어떤 남자를 문 거야? 아, 그래서 그렇게 당당하게 이혼하겠다고 한 거야? 우리 집안에서 쫓겨난 천박한 계집애인 주제에 감히 겸상을 하려고 해?” 이민혜의 억지에 소은호는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차가운 말투로 상대했다. “쫓겨나요? 그쪽 집안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천박이요? 공공장소에서 소리나 질러대는 당신들이 훨씬 더 천박합니다.” 3년 동안 동생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소은호는 가슴에서 천불이 일 지경이었다. 소은호의 말에 이민혜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매니저를 향해 명령했다. “야, 너 계속 보고만 있을 거야? 당장 쫓아내라고!” 이에 매니저도 더 이상 참지 않고 입을 열었다. “사모님, 아가씨, 소은호 대표님은 저희 레스토랑의 대주주님이십니다. 저희 레스토랑의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이만 나가주시죠.” 생각지 못한 매니저의 태도에 이민혜도, 박예리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두 사람의 표정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던 소은정이 피식 웃었다. “됐어. 그냥 밥 한 끼 먹는 건데 서로 얼굴 붉힐 필요 없잖아? 저 두 사람 나한테 긴히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까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어.” 소은정이 소은호를 향해 말했다. 소은호는 아직 분이 덜 풀린 상태였지만 더 이상 소은정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결국 그녀의 말대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평소에 차가운 포스로 유명한 소은호가 고분고분 행동하는 모습에 매니저도, 레스토랑 직원들도 경악을 금치 못하며 대표님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소은정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편, 박예리는 여전히 비아냥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하, 그래. 부끄러운 줄은 아나 봐? 보아하니 또 애꿎은 호구 하나 잡은 것 같은데 네가 이런다고 우리가 겁먹을 줄 알아? 내 말 한마디면 내일 당장 A시에서 고개도 못 들고 다니게 할 수도 있어!” 여전히 안하무인인 박예리의 모습에 소은정은 큭큭 웃더니 순식간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제가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뭐, 사과의 의미로 술이나 한 잔 따라. 우리 집안 며느리로 있었을 때는 우리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잖아? 뭐 그동안 가정부처럼 일해준 정을 생각해서 이 정도로 넘어가 줄게.” 박예리는 팔짱을 끼고 소은정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과연 소은정은 웃더니 와인이 담긴 디캔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숙련된 손놀림으로 와인잔에 술을 따르고 박예리에게 건넸다. 박예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잔을 받으려는 순간, 차가운 액체가 그녀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렸다. 소은정은 잔에 담긴 와인을 전부 박예리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박예리가 악을 쓰며 반항하려던 순간, 그녀는 박예리의 어깨를 눌러 테이블에 고정시킨 뒤 귓가에 속삭였다. “아가씨,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혼, 내가 먼저 제안한 거예요. 당신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박씨 가문, 내가 버린 거라고요. 도박 건으로 입지도 잃고 성격도 좀 죽였을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 쉽게 안 변하네요? 또다시 함부로 입을 놀리면 그때는 정말 A시에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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