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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증명

오랫동안 사랑해 온 사람이, 이토록 어리석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구재이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형편없는 눈을 가졌는지를. 더는 그들의 연극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서류를 챙겨 돌아서려던 찰나, 이세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하지 않은 일은 정말 하지 않은 거예요. 왜 그렇게 믿어주지 않는 거죠? 아니면 내가 재이 씨의 결혼을 빼앗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복수하는 건가요? 하지만 그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두 사람 앞에 나타난 적이 없어요. 이번에도 영화 촬영 때문에 귀국한 것뿐인데, 왜 나를 이렇게 몰아붙이는 거죠?” 그녀의 말은 구재이를 향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하나하나 모두 구재이를 겨냥한 것이었다. 구재이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기가 막힌 가족들이었다. 한쪽은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첫사랑’을 맹목적으로 믿고 그 ‘첫사랑’이라는 여자는 어떻게든 그 자리를 빼앗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구재이는 담담히 그들을 바라봤다. 민지환의 눈빛에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했다. 마치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삼킬 듯이 말이다. 구재이는 비웃으며 말했다. “결국 세희 씨도 이 일이 내가 한 거라고 믿는 거네요?” “그럼 누가 했겠어? 세희 씨를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잖아!” 구재이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럼 내가 하나만 물을게. 이게 내가 한 일이라는 증거라도 있어? 없으면 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어.” 모두의 시선이 이세희에게 쏠렸다. 그중 한 사람, 시어머니 한정미는 잠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세희는 똑똑한 여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두세 마디만 해도 금세 흔들릴 정도로 단순했다. 게다가 ‘그 대본 사건’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무슨 일인지 자세히 몰랐지만 확실히 구재이의 말에 일리가 있어 보였다. 자신의 목숨을 걸 만큼 확신에 찬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세희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한정미의 흔들린 시선을 본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다 곧바로 고개를 돌려 민지환을 바라봤다. 그녀는 알았다. 이 집에서 결정권을 쥔 사람은 오직 민지환뿐이었다. 그가 자신을 믿어주기만 하면 이 일은 아무 일도 아닌 일이 될 것이었다. “지환 씨는요? 지환 씨도 나를 믿지 않는 거예요? 우리 벌써 몇 년을 알고 지냈잖아요. 그때... 우리 거의 가족이 될 뻔했잖아요. 그걸 다 보고도, 정말 내가 이런 짓을 할 거라 생각해요?” ‘그때의 일’이 언급되자 민지환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 사건은 민지환의 인생에서 가장 깊은 상처였다. 그는 이세희를 ‘반드시 가져야 할 여자’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때의 후회와 미련이 민지환의 마음속에 날카로운 가시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일보다 이세희에게만큼은 관대했다. 그리고 그 관대함이 결국 구재이에게 깊은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조차 민지환은 끝내 깨닫지 못했다. “아니요, 나는 세희 씨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는 믿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상황이 이렇다면 진짜 증거를 내야 해요. 그날 세희 씨가 어디 있었는지 기억나죠?”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민지환은 이미 이 상황의 중점을 파고들고 있었다. 이 일을 해결하려면 이세희의 결백을 증명할 증거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런 증거를 찾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의 말이 끝나자 이세희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역시 지환 씨는 날 믿지 않는 거군요? 재이 씨가 두 마디 했다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거예요? 증거가 필요하다고요? 좋아요, 그럼 지금 죽어서 보여줄게요. 그러면 믿겠어요?” 그 말은 너무 극단적이었다. 민지환은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자기 목숨을 장난처럼 내던질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이세희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곧장 캐비닛 모서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 캐비닛은 모서리 부분이 매우 날카로웠기에 평소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며칠은 욱신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이세희가 아예 머리로 들이받은 것이다. 순간 민지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한정미 역시 비명을 질렀다. 그 와중에도 구재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 ‘연극’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세희가 누구보다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구재이가 걸었던 맹세조차 두려워 회피한 그녀였다. 그게 곧 증거였다. 민지환은 반사적으로 뛰어가 이세희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이마는 캐비닛 모서리에 부딪힌 뒤였다. 다행히도 완전히 들이받기 전에 잡아당긴 덕분에 즉사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마가 찢어져 피가 얼굴 가득 흘렀다. 이세희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조금 전은 정말 무서웠었다. 민지환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진짜 부딪혔을지도 몰랐다. “세희 씨, 세희 씨! 괜찮아요?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해요! 내가 세희 씨 말 안 믿는다고 한 적 없잖아요!” 민지환은 겁에 질린 얼굴로 이세희를 꽉 끌어안았다. 이세희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앞이 아득했다. “난... 그냥...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몰라서요. 이제... 날... 믿겠어요?” 민지환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까지 내던져 결백을 증명하려 한 그녀를 이제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재이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와, 정말 완벽한 연기네.’ 그녀는 조용히 비웃었다. 이 연극은 이제 끝이 났고 자신이 더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구재이를 그렇게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문으로 나서려 할 때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거기 서!” 구재이는 짜증이 치밀었다. “이제 또 뭐야?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데?” “세희 씨를 이런 지경까지 몰아넣고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안 할 거야?” 구재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몰아넣었다고? 정말 제정신이 맞는 걸까?’ 누가 봐도 이 일은 자기와 상관없었다. 벽에 머리를 박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 ‘죽지도 않았는데 이게 왜 또 내 탓이 되는 건데? 만약 죽기라도 했으면 날 살인죄로 몰아가겠다는 뜻인가?’ “내가 아까도 말했지. 머리가 나쁘면 병원 가서 진단 좀 받아. 내가 세희 씨 해쳤다는 증거라도 있어? 없다면 인도적 차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응급차 불러주는 것뿐이야.” 말을 끝내자마자 구재이는 민지환과 한정미가 보는 앞에서 휴대폰을 꺼내 병원에 전화를 걸 준비를 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병원까지 한 시간은 걸려. 의사가 오고 가는 데만 두 시간은 잡아야 한다고. 당신, 정말 이대로 세희 씨가 피 흘리며 죽어가는 걸 지켜볼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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