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집으로
구재이는 이를 악물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돼?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당신이 운전해.”
그 말에 구재이는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민지환은 아무렇지 않게 이세희를 번쩍 안아 들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구재이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움직일 생각조차 없었다.
그러자 한정미가 다가와 그녀를 세게 밀쳤다.
“멍하니 서서 뭐 해? 죽기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어서 운전이나 해! 정말 재수가 없어서, 원...”
구재이는 그 비아냥 섞인 표정을 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그래, 이 여자도 이세희를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구나.’
진심으로 아꼈다면 이런 상황에서 ‘재수 없다’는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문득 구재이는 궁금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봐보자고. 이 연극이 어떻게 끝나는지.’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그녀는 차 키를 들고 나섰다.
결국 운전기사는 자신이었다.
차 안에서 민지환은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주세요. 최고 수준의 의사를 붙여주셔야 합니다.”
그 말에 구재이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최고의 의사? 이세희를 완전 수준이 다른 사람 취급하네.’
그 정도 상처라면 조금 시간만 지나면 자연히 아물 것이었다.
속으로 아무리 그렇게 중얼거려도 차는 이미 병원으로 달리고 있었다.
도착해보니 병원은 이미 대기 중이었다.
차가 멈추자 의료진들이 들것을 밀고 와 이세희를 급히 수술실로 옮겼다.
구재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참 대단하다. 이번에는 아예 수술실 연기라니.’
하지만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이세희는 다시 수술실에서 나왔다.
의사의 표정에는 묘한 난처함이 묻어 있었다.
민지환은 그녀의 얼굴만 보느라 그 미묘한 기색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습니까, 선생님? 세희 씨는 괜찮습니까?”
의사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상처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습니다. 환자분이 너무 놀라신 것 같네요. 이미 봉합은 마쳤고 약간의 뇌진탕 증상이 있어 정밀 검사를 진행 중입니다. 결과는 세 시간 내로 나올 겁니다. 혹시 모르니 며칠 정도 입원시켜 관찰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구재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봐, 내 예상대로잖아.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상처가 이미 아물고도 남았겠다.’
이세희의 상처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 시간 넘게 수술실에 있던 걸 보면 의사들도 민지환을 마주하기 곤란해
시간을 끌며 버틴 게 분명했다.
결과를 들은 민지환은 긴 숨을 내쉬었다.
안도감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이세희가 병실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 그녀의 곁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구재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는 아예 투명한 공기처럼 취급당했다.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를 단번에 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구재이는 묵묵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가슴이 타들어 가듯 아팠다.
그 고통이 서서히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본 순간, 그녀의 마음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전화를 받지 않자 두어 번 벨이 울리다 끊겼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구재이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결국 통화를 받기로 했다.
“큰오빠...”
“이제 집으로 돌아올 때가 됐지?”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구재이의 눈가가 붉어졌다.
3년 만이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가족의 전화를 받지 않았었다.
그녀는 늘 믿었다.
가족과 자신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벽이 생겨버렸다고.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은, 가족을 제외하면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오빠의 목소리를 들은 구재이는 코를 한 번 훌쩍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알... 겠어.”
...
민지환은 병실 앞을 지키며 이세희가 완전히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이세희가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꺼낸 말은 구재이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 일은 재이 씨와 전혀 관계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재이 씨랑 진짜로 잘 얘기해봐요. 이 일은 정말 재이 씨랑 무관해요.”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아직도 구재이 편을 드는 거예요? 구재이가 무슨 마법이라도 걸었어요? 세희 씨 사고 난 뒤에 그 사람이 도망가려 했다면, 그건 어디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런 거라고요. 제발 구재이 편 좀 그만 들어요.”
민지환은 화가 났다.
이세희가 병실에 들어온 뒤 구재이를 찾아오라고 했지만 이미 구재이는 자리를 떠난 뒤였다.
그리고 휴대폰에는 이세희 관련 스캔들이 파도처럼 이어져 올라왔다.
기사들이 하나둘 떴고 분명히 그녀를 정상에서 끌어내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이세희가 어렵사리 얻은 지금의 위치를 누군가 끊어놓는 것을 민지환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하여 그는 모든 문제의 책임을 구재이에게 돌렸고 구재이를 찾으려 했지만 닿지 않았다.
이세희는 속상해하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난 재이 씨가 그런 짓을 했다고는 믿지 않아요. 설령 그게 사실이라도 난 재이 씨를 용서할 수 있어요. 결국에는 내 잘못이기도 하니까요. 내가 지환 씨 곁에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거고, 다들 여자잖아요. 지환 씨 생활에 내가 끼어드는 걸 재이 씨가 신경 쓰는 것도 당연해요.”
“그 사람한테 변명 대주지 마요. 이건 다 그 사람 잘못이에요.”
민지환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내면 깊은 곳에서 이 일이 구재이의 소행이라고 믿기로 결정했고 누구의 말도 더는 듣지 않으려 했다.
이세희는 입만 벌리고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속으로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민지환이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편들어 주는 모습을 보자 안도와 기대, 그리고 약간의 애정까지 섞인 눈빛을 보냈다.
민지환은 살짝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의 시선을 직접 마주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너무 명확히 말해버리면 안 되는 일들도 있었다.
그는 다른 볼일이 있다며 핑계를 대고 급히 병원을 떠났다.
민지환이 떠나자 원래는 연약해 보이던 이세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들을 떠올리면 분노가 치밀었다.
만약 이 일의 진상이 민지환에게 알려진다면 그녀의 모든 것이 끝장날 수 있었다.
때문에 반드시 방법을 찾아 이 일에서 자신은 벗어나게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