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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온나연이 법의학 실험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새벽에 가까웠고, 하늘에는 쌀알만 한 눈이 흩뿌리기 시작했다. 연말이 가까워 길 위의 사람들은 발걸음이 바빴고, 그녀는 검은 코트를 여며 올렸다. 창백한 뺨은 차갑고 쓸쓸했다. “초박형...” 24시간 불빛이 환한 편의점. 온나연은 문을 밀고 들어가 카운터 앞으로 가 익숙하게 말한 뒤 잠깐 멈추고 덧붙였다. “두 개요.” “두... 두 개요?” 모바일 게임을 하던 젊은 점원은 그녀를 힐끗 몇 번이나 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모르는 법이네. 대단한 체력이야.’ 콘돔을 산 온나연은 휴대폰을 켜 주소를 확인하고, 크론 호텔 23층에 있는 스위트룸으로 곧장 향했다. “나연 씨, 드디어 왔네요!” 보라색 실크 슬립을 입은 양수민은 문 앞에서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온나연을 보자마자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달려와 맞았다. “정말 미안해요, 그래도 나연 씨가 저랑 경민 오빠 일 좀 도와줘야죠. 나연 씨도 알잖아요, 오빠는 저 없이 한 순간도 못 버텨요.” 그 말과 함께 양수민은 일부러 방 안쪽으로 시선을 흘렸다. 애교이자 도발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는 긴 다리를 꼬았고, 칼로 새긴 듯한 잘생긴 얼굴에는 표정이 많지 않았다. 말 한마디 안 해도 압박감이 강했다. 마치 싸늘한 공기가 한 줄기씩 밖으로 새어 나오는 듯했다. “고마울 것 없어요. 그냥 가는 길에 하는 일이에요.” 온나연의 담백한 얼굴에도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저도 희수가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이 늘어나는 건 보기 싫어요. 어쨌든 선 잘 지켜줘요. 그래야 우리 모두가 행복하죠.” 여자가 입에 올린 여희수는 온나연의 다섯 살짜리 딸이었다. 그리고 방 안의 그 귀한 남자는 법적으로 그녀의 남편, 소문에 따르면 발을 한 번 구르면 경시가 세 번은 흔들린다는 YS 그룹의 대표 여경민이었다. 온나연은 늘 이렇게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랑은 생이별과 사별이 아니라, 꽃처럼 시작해 티끌처럼 흩어지고 말끝마저 삼켜지는 사랑이라고.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당시 여경민이 그녀를 좋아할 때, 요란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집요했고 길었다. 백발이 되어도 갈라지지 않겠다고 맹세하던 사이였다. 사랑이 뒤로 갈수록 백발까지 갈 수 있는지는 온나연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배신당한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임신 때 틈을 타 누가 끼어든 걸 수도 있었고, 아니면 여경민이 처음부터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던 걸 수도 있었다. 여희수가 태어난 뒤로, 한때 그녀를 애지중지하던 남편은 각종 여자들과 애매한 사진을 수시로 터뜨렸다. 위로는 스타와 명문가 아가씨, 아래로는 청순한 여대생까지. 길게는 5달, 짧게는 사흘. 끊긴 적이 없었다. 처음에 온나연은 뼈가 시리도록 아팠다. 울고, 소리치고,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했다. 그러다 서서히 아무렇지 않게 됐다. 가끔은 아예 통 크게 그들에게 콘돔을 배달해 주기도 했다. 괜히 귀찮은 일이 벌어져 여희수가 상처받는 일을 막으려는 거였다. “볼 일 없으면 저 먼저 갈게요. 둘이 신나게 노세요.” 온나연은 콘돔 두 개를 양수민의 손에 쥐여주고는 쿨하게 돌아섰다. “나연 씨!” 도발이 실패하자 양수민은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이를 악물다 못해 부서질 지경이었다. “나연 씨, 경민 오빠랑 이혼할 생각 해본 적 있어요?” 공기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온나연은 몸을 돌려 여경민의 새 애인이 된 이 여자를 다시 훑어보았다. 젊고, 예쁘고, 순해 보이고, 어느 누구보다 자신만만하고 과감했다. ‘쯧, 앞길이 창창하네!’ “저도 알아요. 경민 오빠가 예전에는 나연 씨를 정말 사랑했죠.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은 저예요. 남녀 관계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쪽이야말로 진짜 내연녀예요. 아마 이혼이 두 분 모두한테 좋을지도 몰라요.” 방 안의 남자는 눈동자 깊은 곳의 한기를 거두듯 정리하며 온나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치 한 세기만큼 길게 침묵이 이어졌다. 상처투성이가 된 온나연의 마음은 이미 온갖 독에도 무감해져 있었다.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그건 수민 씨가 잘 몰라서 그래요. 사랑 여부는 결혼의 필수 항목이 아니에요. 제가 이혼을 안 하는 건 사실 두 사람을 위해서예요. 왜냐하면 결혼... 그게 사랑의 무덤이거든요.” 몇 마디에 양수민은 할 말을 잃었다. “온나연, 너는 자존심도 없어?” 풍우가 몰아칠 듯한 분노가 실린 여경민의 차가운 목소리가 문 안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자존심? 그게 뭐 밥 먹어주나요?” 온나연은 피식 웃었다. 고발 같기도, 자신을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경민 씨랑 결혼하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저 자존심 같은 건 없었어요.” “질질 끈다고 내가 너를 어떻게 못 할 줄 알아?” 끝내 인내심을 잃은 여경민은 체면이고 뭐고 내던졌다. 방문까지 걸어 나와 한때 깊은 정으로 가득하던 그 눈으로 지금은 아무 감정도 없이 온나연을 내려다봤다. “난 상관없어. 계속 너랑 기싸움해도 돼. 어차피 고통스러운 쪽은 너잖아!” 말을 마치고 그는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양수민의 가늘고 부드러운 허리를 감싸안고, 농염한 공기 속으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밤은, 아직 길었다. 문이 꽉 닫히는 것을 바라보며 안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퇴폐적인 숨소리를 들으니, 온나연은 온몸이 싸늘해졌다. 여씨 가문의 별장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 깊고도 깊었다. 온 세상이 조용해졌고, 온나연에게 남은 것은 지치는 피로뿐이었다. 그녀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딸 여희수의 방으로 갔다. 꼬마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우유 냄새 나는 포동포동한 얼굴은 분홍 토끼 인형에 살짝 붙어 있었고, 자잘하고 단정한 이목구비는 정교하게 깎아낸 듯했다. 엄마의 부드러움은 닮고, 여경민의 차가움도 살짝 닮았다. 고작 다섯 살인데도 벌써 영락없는 미인이었다. 온나연은 손을 뻗어 딸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랐고, 가슴속이 따뜻해졌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녀는 너무 많은 변고를 겪었다. 부모님의 뜻밖의 교통사고 사망에서부터, 여경민의 끝없는 바람까지. 여희수는 쓴 삶 속에서 그녀가 얻은 유일한 단맛이었다. 그래서 왜 끝까지 이혼을 질질 끌까? 당연히 이 꼬마 때문이었다. 온나연은 자신이 비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 현실을 더 꿰뚫어 볼 뿐이었다. 이혼은 분명히 잠깐은 속이 시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희수는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온나연이 양육권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법의학 일은 바빠지면 밤낮이 뒤바뀔 것이라 돌볼 시간이 없었다. 양육권을 포기하면, 어린 여자아이가 여씨 가문에 남게 된다. 2년도 채 못 가 동생들이 주렁주렁 늘고, 정체 모를 새엄마까지 올지 몰랐다. 그다음의 처지는 뻔했다. 이리저리 따져 보니 질질 끄는 것이 최적의 해법이었다. 오기가 귀한 거야 사실이지만, 그걸 감당할 자격이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누구에게 시집가도 결과가 그럴 거라면 차라리 헤어지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바탕 마음속으로 계산을 마치고 나니 밤새 답답하던 기분이 그나마 조금 트였다. 최근 여희수는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는 갖가지 펜과 종이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온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리할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가 문득 내용이 기묘한 한 장의 그림에 눈길이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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