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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그날 밤, 나는 평소처럼 과일주스를 가지러 냉동실로갔다. 막 나가려는 순간 문은 이미 굳게 닫혀 아무리 힘껏 당겨도 꿈쩍하지 않았다. 얇은 잠옷 차림이었던 나는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기운이 빠져 두 팔로 몸을 끌어안은 채 주저앉았다. 박훈의 말이 틀림없었다. 나는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탔다. 그동안 춤을 위해 극단적인 식이조절과 밤샘 연습을 반복해 몸은 이미 오래전에 망가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속눈썹 위에 성에가 내려앉았다. 이대로 여기서 죽는 게 아닐가라고 생각하던 순간 문이 갑자기 열렸다. 도우미가 놀란 얼굴로 외쳤다. “사모님, 왜 여기 계세요?” 냉동실을 나오자 사방에서 온기가 밀려왔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방으로 돌아가려다 안에 두고 온 물건이 떠올라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때, 문을 열어준 도우미의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사모님이 무사히 밖으로 나오셨어요. 많이 얼어 계시긴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박훈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목소리에는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 “안 죽었으면 됐어.” 말을 마치고 박훈은 전화를 끊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나는 단번에 박훈의 목소리인 걸 알아차렸다. ‘내가 갇힌 게 사고가 아니었어. 전부 박훈이 의도한 거였어. 박훈이 심영지를 데리고 나가면서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내 착각이 아니었어. 내가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건드린 게 맘에 안 들어 벌주고 싶었던 거였어.’ 한여름, 저택의 실내 온도는 28도였지만 나는 여전히 냉동실 안에 있는 것처럼 온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그대로 깊이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머리는 심하게 어지러웠고 이마는 손을 대기 무서울 정도로 뜨거웠다. 예상대로 고열이 났고 목은 바싹 말라 있었다. 도우미가 보이지 않아 나는 이불을 걷어내고 겨우 일어나 물을 마시러 나갔다. 복도를 지나던 중 어느 방문 너머에서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어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줘요? 이런 일까지 해줄 줄은 몰랐어요.” 여자는 심영지였다. 박훈은 눈가가 붉어진 그녀를 바라보다 손을 살짝 움켜쥐면서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닦아주기만 했다. “춤이 네 꿈이라고 했잖아. 널 위해서라면 난 못 할 게 없어.” 심영지는 그대로 박훈의 품에 안겼다. “오빠는 정말 바보예요. 나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랑 결혼까지 하려 하다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심영지는 고개를 들어 박훈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박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닫았고 목의 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참고 있었다. “영지야, 이러지 마. 난 이미 약혼한 몸이야. 넌 아직 미혼이니까 이러면 너한테 좋지 않아.” 나의 머리가 더 심하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눈 앞은 빙글빙글 돌았다. 문득, 박훈이 내 고백을 받아주던 날이 떠올랐다. 사귀기로 한 그날 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가졌다. 내가 아파서 눈물을 흘리자 그는 닦아주며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진짜로 소중한 사람 앞에서는 이렇게까지 조심하였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심영지의 울음소리가 이어졌고 박훈의 셔츠 앞자락은 이미 젖어 있었다. “오빠, 이렇게 잘해주면 난 오히려 더 무서워요. 아무리 그래도 오빠는 언니의 약혼자잖아요. 언젠가 둘이 결혼하고 아이도 낳으면 지금처럼 날 좋아하지 않을 거잖아요.” 박훈은 그녀의 코끝을 살짝 긁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지야, 너 참 바보야. 난 애초에 심하영을 사랑하지도 않았어. 내 아이를 가지게 할 생각도 없고. 심하영이 유린당하던 날 이미 사람들한테 자궁을 망가뜨리라고 지시했어. 심하영은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어...” 그 뒤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저 온몸의 피가 한순간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동안 아무런 피임도 하지 않았는데 단 한 번도 임신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박훈 앞에서 운 적도 있었다. 나의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는 곧바로 심영지의 엄마와 재혼했다. 세 사람이 웃으며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이 집의 사람이 아니라 늘 남의 집에 얹혀 사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박훈에게 나만의 가족을 만들고 싶어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마다 그는 나를 안고 부드럽게 위로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 모든 게 그의 손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아, 그랬구나. 그랬던 거구나.’ 눈시울이 시큰거렸지만 이제는 더 이상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와 머릿속에 새겨진 번호를 꺼내 들어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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