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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열여덟 살 되던 해 심민지는 금융학과 황태자라 불리는 남자에게 푹 빠져버렸다. 다들 그녀가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람은 뜨거운 연애를 시작했다. 연애하는 동안 그는 심민지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매일 아침 8시 수업 전에 맞춰 아침을 사다 주었고 도시 반대편까지 가서 심민지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사 오곤 했다. 심지어 그녀 때문에 친구들과 등을 돌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심민지의 집안이 부도나기 일보 직전이 되었는데 아무도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그에게 매달렸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싸늘하기만 했다. “여자친구는 무슨. 그냥 돈만 주면 데리고 놀 수 있는 여자야.” 그 순간에야 심민지는 비로소 깨달았다. 황태자의 사랑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고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그저 심심풀이용 노리개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의 눈에 그녀는 그저 어떻게든 신분 상승을 이루려는, 출신이 보잘것없는 속물일 뿐이었다. 그렇게 심민지의 첫사랑은 초라하게 막을 내렸고 두 사람은 각자 갈 길을 갔다. 그러다가 4년 만에 이 연해 도시에서 그 사람과 재회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지금의 그는 소년미를 완전히 벗어던졌다. 맨날 하고 다니던 귀걸이를 더는 하지 않았고 비즈니스 엘리트의 아우라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과거 보여줬던 오만함 대신 이제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자신감과 여유가 짙게 배어 있었다. 어디에 있든 스포트라이트가 그에게 집중되지 않아도 항상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존재가 되었다. 반면 심민지는 그사이 교도소에 다녀왔고 밑바닥 인생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개미 한 마리에 불과했다. 그녀는 존재감을 최대한 감추고 시끌벅적한 만찬 자리에서 조용히 벗어나려고 고개를 숙였다. “민지 씨, 잠깐 이리 와봐.” 연회장을 빠져나가려던 그때 심민지의 직속 상사인 변석주 부장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심민지는 돌아보지 않았는데도 비웃음 가득한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변석주가 성지태에게 다가갔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리엔 호텔의 영업 부장 변석주입니다. 이쪽은 영업 팀장 심민지 씨고요. 귀사에서 저희 호텔을 행사장으로 선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심민지는 변석주의 뒤에 뻣뻣하게 선 채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신발 끝만 내려다봤다. 성지태가 테이블에 나른하게 기대더니 고개를 기울여 변석주의 뒤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면서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 “이 호텔의 채용 기준이 이렇게 낮은 줄 미리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겁니다.” 변석주의 표정이 굳어졌다가 이내 미안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혹시 저희 호텔의 서비스에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라도 있으신가요?” 성지태가 턱으로 심민지를 가리켰다. “백만 원이면 살 수 있는 싸구려가 여기서 영업 팀장을 하고 있다니. 이 호텔에는 인재가 그렇게나 없나요?” 그의 한마디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심민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성지태가 그녀를 혐오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줄은 몰랐다. 백만 원은 성지태가 심민지를 모욕했던 돈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사랑을 나눈 후 성지태는 심민지에게 백만 원을 줬다. 심민지는 남자친구가 주는 용돈이라 생각했지만 성지태에게 그 백만 원은 유흥비였다. 수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 숫자는 여전히 그녀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댔다. 성지태의 말에 변석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오랜 영업 경력으로 분위기를 풀려고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 유머 감각이 참 뛰어나시네요. 혹시 저희 심 팀장과 아는 사이이신가요?” “아는 정도가 아니죠. 잠자리도 했는데. 안 그래? 심 팀장?” 조롱이 가득 담긴 말들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심민지의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심민지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술잔을 집어 들고 시선을 늘어뜨린 채 모든 굴욕을 꾹 삼키고는 억지로 미소를 쥐어짰다. “대표님, 어렸을 때는 누구나 다 미숙한 법이죠. 혹시 제가 무례를 범한 부분이 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한 잔을 들이켜고 돌아섰을 때 성지태의 어두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만족하지 못한 눈치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심민지는 다시 술을 석 잔 따랐다. “대표님, 그땐 분수를 모르고 탐내서는 안 될 것을 탐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연속 석 잔을 들이마셨다. 와인의 쓴맛이 가슴속의 쓴맛을 짓눌렀다. 성지태가 와인잔을 꽉 움켜쥐었다. 살짝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실눈을 뜬 채 심민지가 연이어 술을 들이켜는 모습을 지켜봤다. 예전의 심민지는 누가 한 대 때리면 열 배로 갚곤 했다. 그가 이렇게 모욕한다면 무조건 바로 덤벼들었을 터. 하지만 지금의 심민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너무나 재미가 없었다. 변석주는 심민지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고 그녀의 주량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나 감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성지태의 옆에 있던 비서가 재빨리 귀띔했다. “대표님, 진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지태는 그제야 와인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차갑게 말했다. “이 호텔에서 다시는 이 여자를 보고 싶지 않네요.” 그러고는 심민지를 빤히 쳐다본 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린 심민지는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의 뜻은 호텔 측에 그녀를 해고하라는 지시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협상의 여지도 전혀 없었다. 변석주도 더 이상 손님 접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심민지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는 걸 보자마자 그녀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화장실, 심민지는 조금 전 마신 술을 전부 다 토해냈다. 토한 다음에는 초라한 모습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변석주가 생수 한 병을 건네면서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민지 씨, 성 대표님이랑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 왜 민지 씨를 저렇게 싫어하는 거야?” 심민지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낸 뒤 쓴웃음을 지었다.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많이 갈라져 있었다. “대표님은 절 사랑한 적도 없는데 싫어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어요?” 변석주는 심민지가 말하기 꺼리는 줄 알고 한숨을 쉬었다. “얘기하기를 꺼리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성 대표님이 저렇게 얘기한 이상 우리 호텔에서도 민지 씨를 더는 쓸 수가 없어.” 심민지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다급하게 변석주의 팔을 잡았다. “부장님, 전 이 일이 정말 좋아요. 우리 함께 일한 지 2년이나 넘었잖아요. 이번 한 번만 저를 지켜주신다면 나중에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 변석주가 난감해하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부탁해도 소용없어. 내가 돕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성신 그룹이 우리 호텔에 가져다주는 이익이 민지 씨를 해고했을 때 줘야 하는 배상금보다 훨씬 많아.” 심민지의 손이 맥없이 축 늘어지면서 바닥에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당장 먹고살 일자리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전과 기록이 있고 갚아야 할 막대한 빚이 있었다. 이 호텔을 그만둔다면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전과 기록을 조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월급도 많이 주는 일자리가 이 호텔 말고는 없었다. 머릿속으로 탈출구를 생각해봤지만 생각할수록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해고가 아니었다. 이대로 해고당하면 최소한 배상금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만약 성지태가 심민지의 전과 기록을 호텔에 발설한다면 그녀는 한 푼도 받지 못할 것이다. 심민지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서야 변석주는 방금 너무 심하게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민지 씨, 이런 일은 당사자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 성 대표님한테 직접 부탁해봐. 어쩌면 과거의 정을 생각해서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잖아.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은 현실 앞에서 고개를 숙일 줄도 알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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