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육지헌은 그 자리에 서서 복잡한 표정으로 강태리와 소민희를 번갈아 보았다.
“지헌 오빠.”
소민희가 그의 옷깃을 살며시 잡아당기며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강태리 씨가 푹 쉬게 해. 지금은 안정이 필요해.”
육지헌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천천히 풀었다.
그는 강태리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갈등과 의심, 그리고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약간의 연민이 담겨 있었다. 마침내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잘 쉬어. 나중에 다시 올게.”
문이 조용히 닫혔고 병실에는 강태리 혼자 남았다. 그녀는 손을 살며시 아랫배에 얹고 창밖을 바라봤다. 밖에는 어둠이 내려앉았고 땅거미가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들어 바닥에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 육지헌의 눈에서 본 의심이 담긴 눈빛, 소민희의 의기양양한 시선, 그리고 지난날 자신이 겪었던 굴욕과 고통이 떠올렸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하얀 시트에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미안해, 아이야.”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마가 너를 이런 때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녀가 배 속 작은 생명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 지금껏 가져본 적이 없었던 용기가 갑자기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이 아이를 남기고 싶었다.
육지헌이 떠난 후 강태리는 침대 위에서 뒤척였다. 깊은 밤, 간호사가 예전과 마찬가지로 태아의 안정을 돕는 약을 가져왔다. 그녀는 간호사의 눈빛이 흔들리고 물컵을 건네는 손이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랫동안 형사로 지낸 경험으로 강태리는 경계심이 일었다. 그녀는 약을 혀 밑에 숨겨두었다가 간호사가 나간 후 바로 뱉어내 자세히 살펴보았다.
알약에 찍힌 문양이 평소에 복용하던 태아 안정제와는 완전히 달랐다.
다음 날 밤, 강태리는 깊이 잠든 척했다. 아니나 다를까 육지헌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달빛 아래 그의 모습은 유난히 외로워 보였다.
그는 침대에 다가와 강태리의 잠든 얼굴을 바보며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쥐었다가 폈다.
그는 돌아서서 나가려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가루 한 봉지를 꺼내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물컵에 넣었다.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강태리가 갑자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 하는 거야?”
육지헌은 그녀가 깨어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듯 손에 든 물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의 얼굴에 당황하고 죄책에 잠긴 표정이 교차했으나 이내 차갑게 굳여졌다.
강태리는 물컵을 낚아챘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거 뭐야?”
“아이를 지워.”
육지헌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약간 떨리고 있었다.
“이 아이는 내 아이라고 장담할 수 없으니 남겨둘 수 없어.”
“이건 네 아이라고.”
강태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 쳤다. 눈물이 순식간에 쏟아졌다.
“단지 소민희 씨 말 때문에 당신은 친자식을 지우려고 하는 거야? 당신은 마음이 있긴 해?”
육지헌이 다가왔다. 그는 주먹을 꽉 쥔 탓에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그때 네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날이 많았잖아. 이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 어떻게 알아? 민희 말이 맞아, 난... 나는 다른 사람 아이를 대신 키울 수 없어.”
그는 힘겹게 마지막 말을 뱉어냈다.
분노와 절망이 강태리에게 놀라운 힘을 불어넣었다.
육지헌이 그녀를 잡으려 손을 뻗었을 때 그녀는 침대 머리맡의 꽃병을 집어 그의 뒷머리에 힘껏 던졌다.
육지헌은 신음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강태리는 다른 건 생각하지도 않은 채 병원복 차림으로 병실을 뛰쳐나왔다.
한밤중의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폭우가 쏟아졌다.
그녀는 김도운을 찾아 도움을 청하려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녀가 길모퉁이에 거의 다다랐을 때 눈부신 차량 전조등 빛이 갑자기 비쳤다.
강태리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가렸지만 운전석에 앉은 소민희의 흉악한 미소가 보였다.
쾅.
격렬한 충격과 함께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강태리는 자신이 또다시 병원에 누워 있음을 발견했다.
육지헌이 병상 옆에 서 있었고 눈빛은 흐릿했지만 그녀의 손을 꼭 잡은 그의 손은 살짝 떨고 있었다.
“태리야, 무서워하지 마. 방금 사고가 좀 있었어. 의사가 작은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어.”
강태리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수술실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무슨 수술인데?”
“네 건강을 위한 간단한 수술일 뿐이야.”
육지헌은 고개를 돌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임신 중절 수술실.
수술실 문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나서야 강태리는 모든 것을 완전히 알아차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침대 가장자리를 붙잡았다. 손톱이 부러져 피가 나도록 힘을 주었지만 그녀는 아픈 것도 느끼지 못하고 애원했다.
“안돼, 여보, 제발...”
그녀는 침대에서 굴러내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두 손으로 그의 다리를 꽉 움켜쥔 채 이마를 차가운 바닥에 힘껏 내리꽂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이건 당신 아이야, 나 맹세해. 어떤 검사든 다 받을게. 제발,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이 아이를 남겨줘, 내가 무릎 꿇고 애원할게. 아직 이 세상에 와보지도 못했는데...”
그녀는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렸다. 곧 이마는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물과 피가 뒤섞여 시야를 흐렸다. 목소리는 갈라 터져 쉬어버렸다
“내가 떠날게, 영원히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 이 아이만 살려줘,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