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육지헌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강태리가 비굴하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며 그의 심장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순간 그는 몸을 숙여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모든 요구를 들어줄 뻔했다.
하지만 소민희의 말이 마치 주문처럼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지헌 오빠,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는 게 좋을 거야. 만약 아이가 태어나면 오빠와 강태리 씨 사이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금이 갈 테니까.”
육지헌은 마음을 굳게 먹고 눈을 감았다.
그는 바짓가랑이를 꽉 잡은 그녀의 손을 밀쳐내며 차갑게 말했다.
“이 아이는 정체를 알 수 없으니 남길 수 없어. 나중에... 나중에 다시 아이가 생길 거야.”
“다시는 안 생겨.”
“육지헌, 이제 너와 난 미래가 없어.”
강태리는 비명을 지르며 주변의 의사와 간호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는 무릎으로 기어가 그들의 하얀 가운을 붙잡았다.
“내 아이를 살려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이 아이는 죄가 없어요.”
하지만 모두가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마치 그녀가 끔찍한 전염병인 것처럼.
마취제가 천천히 그녀의 혈관 속으로 주입되었다. 의식이 희미해지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육지헌의 새빨간 눈과 소민희의 의기양양한 미소였다.
강태리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눈을 떴다. 그녀는 가장 먼저 자신의 아랫배를 만졌다. 그곳은 여전히 평평했지만 더는 작은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텅 빈 자궁은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것 같았고 그녀가 영원히 무엇을 잃었는지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육지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 밑의 다크서클은 그가 밤을 새웠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애써 평온한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태리야, 깼구나. 슬퍼하지 마. 그냥... 우리랑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몸조리 잘하면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야.”
이 말에 강태리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육지헌을 째려보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육지헌, 다시는 당신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너와 난 끝났어. 우린 평생 원수야.”
육지헌과 소민희가 전화를 받으러 나간 틈을 타 강태리는 고통을 참으며 수액 관을 뽑고 병원 비상계단으로 비틀거리며 탈출했다.
폭우 속에서 그녀는 몸이 흠뻑 젖었고 걸음마다 땅 위에 희미한 핏자국을 남겼다.
강태리가 쓰러지기 직전 튼튼한 팔이 그녀를 붙잡았다.
“강태리.”
우산을 받쳐 든 김도운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미안해, 내가 늦었어.”
강태리는 속옷 안에서 작은 USB 메모리 스틱을 꺼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했지만 단호했다.
“선배님, 여기 육지헌 씨 회사 자금 세탁 증거랑 소민희가 임 교수님을 살해한 완전한 증거 사슬이 들어있어요. 부탁드려요.”
김도운은 USB를 받아들고 항공권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미국행 비행기야. 세 시간 후에 출발해. 도착하면 마중 나올 사람이 있을 거야. 잘 생각해봐. 여기를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강태리는 항공권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저가 원한 거예요. 저는 그레이민 연구소에 들어가 평생 나오지 않을 거예요.”
탑승을 기다리며 강태리는 마지막으로 이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가득한 이 도시를 돌아보았다.
비행기가 하늘로 솟아오를 때 그녀는 더는 불룩하지 않은 배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담고 있던 이 도시를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