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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잘못했다고?” 뒤돌아선 박도운이 임서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얼마나 뉘우치고 있는지 한번 보여줘 봐.” 말이 끝나자마자 박도운은 임서희의 손목을 잡고 곧장 계단으로 올라갔다. 안방 문이 열리고 쾅 닫혔다. 그는 임서희를 끌고 안방에 있는 작은 칸막이 방으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정교한 박달나무 탁자 위에 위패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것은 박도운이 첫사랑을 위해 세운 위패였고 그 위에는 박도운 아내의 위패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신혼 첫날밤, 임서희는 이 위패 앞에서 밤새 무릎을 꿇었었다. 결혼 생활 3년 동안, 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밤을 새운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박도운은 자신의 아내가 영원히 이 여자뿐이라고 했었다.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첫사랑이었다. “여기서 무릎 꿇고 사죄해. 열심히 사죄하면 내가 마음이 풀려서 이윤이한테 네 신분을 공개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말을 마친 박도운은 이내 칸막이 문을 닫았다. 임서희는 끝없는 나락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는 위패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잘못했어요.” “여기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요. 도운 씨 마음속에 있는 당신의 자리를 빼앗을 생각 하지 말아야 했어요. 3년이 지나고 나니까 이제야 알겠어요.” “하지만... 그거 알아요? 나한테 여기로 오라고 한 사람은 도운 씨였어요. 그 사람이 나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거예요.” 머릿속에 12년 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당시, 18살이었던 박도운은 그녀가 본 남자들 중에서 키가 제일 컸다. 넓은 그의 품에 안긴 순간, 전에는 몰랐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철이 없었던 그녀는 몰래 그에게 입을 살짝 맞추었다. 박도운은 다정한 눈빛으로 임서희를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꼬맹아, 나한테 뽀뽀했으니까 책임져야 해.” “이제부터 넌 내 거야. 잊지 마.” “기다려 줘. 꼭 다시 찾아올 테니까. 내가 안 오면 박씨 가문으로 찾아와서 말해. 나랑 결혼할 사람이라고.”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첫사랑의 위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임서희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 흐느꼈다. 그의 말을 꼭 기억하고 있었는데 박도운은 자신이 한 말을 잊은 지 오래였다. 심장이 점점 더 아팠다. 한참을 흐느끼던 임서희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어. 다 끝날 거니까.” “박도운 씨, 앞으로 6일만 더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6일 후면 슈퍼칩을 이식할 거고 난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거예요.” ... 아홉 번째로 다 탄 담배꽁초가 안방 발코니에 조용히 떨어졌다. 달빛이 박도운의 잘생긴 이목구비를 비추었고 그의 쓸쓸한 표정이 더욱 짙어졌다. 갑자기 펑 하고 칸막이 쪽에서 소리가 났다. 안색이 어두워진 그는 빠른 걸음으로 칸막이로 뛰어들었고 임서희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 몸이 허약한 그녀는 찬바람을 맞아도 쉽게 감기에 걸리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다가가 손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다 댔다. 호흡이 안정된 것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서희.” 목젖을 굴리던 그가 그녀의 창백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기도 전에 무슨 생각이 들었던 건지 손이 다시 허공에서 굳어졌다. 피식 웃던 그가 결국 손을 거두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박도운은 칸막이를 닫아걸고 발걸음을 옮겼다. 임서희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홀로 하룻밤 누워 있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새벽 6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열이 나는 것도 신경 쓸 여유가 없이 그녀는 바로 침실을 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한 시간 후, 식탁에 맛있는 요리가 올라왔다. 박이윤은 육아 도우미를 따라 식탁에 앉았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이를 보며 임서희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이윤아, 이건 네가 가장 좋아하는 산양유야.” 그녀는 예전처럼 박이윤에게 우유를 건넸고 아이의 작은 얼굴은 온도조차 없이 차가웠다. 그때, 멀리서 차분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키가 190cm인 박도운이 우아하고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가까이 다가왔다. 연한 색 셔츠가 탄탄한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단추는 맨 위까지 채워져 있었으며 넥타이는 깔끔하고 포멀했다. 이런 옷차림은 어젯밤 클럽에서 나른하고 산만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임서희는 대충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늘 밤, 두 사람은 본가로 가서 할아버지를 뵙고 이혼에 대해 말씀드릴 예정이다. 이혼할 생각 때문인 건지 박도운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가 박이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박이윤, 엄마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임서희는 몸이 얼어붙었다. 박도운이 마음을 바꾸고 아이한테 정식으로 그녀를 소개할 생각인 걸까? 눈물을 글썽이며 박이윤을 쳐다보는데 아이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차갑게 말했다. “아니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임서희는 눈빛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박도운은 임서희를 힐끗 쳐다보고는 아이를 향해 물었다. “왜 싫어?” 아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여자는 진작부터 절 버렸잖아요. 제 앞에 나타나도 전 싫어요.” 가슴이 꽉 막혔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박도운은 아이한테 엄마가 자신을 버린 거라고 말했다. 섣불리 신분을 고백한다면 아이가 믿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그녀를 싫어하게 될 것이다. 결자해지라고 이 일은 박도운이 직접 아이에게 알려주는 게 최선이었다. 치마를 꼭 움켜쥔 채 임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아침 식사가 끝난 뒤, 육아 도우미는 아이를 데리고 태권도 학원으로 갔다. “박씨 가문의 규칙 때문에 이윤이는 세 살 때부터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어. 개인 트레이너 한 시간의 레슨비가 네 반년 치 생활비야.” “직업도 없는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이 박도운의 아들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함께 외출할 때, 박도운은 그녀에게 양육권을 포기하라고 설득했다. 임서희는 머리가 어지러운 걸 참으며 중얼거렸다. “아이가 지금은 나한테 오해가 있어서 그래요. 난 절대 포기 안 해요.” 그녀의 고집에 마음이 답답해진 박도운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을 핑계로 이혼을 미룰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 너랑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네가 한 약속 잊지 않았지? 할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 잠시 후, 차가 박씨 가문의 본가에 도착했다. 임서희는 박도운을 따라 박충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 있는 사진들이 임서희의 눈에 들어왔다. 바로 어젯밤 박도운이 클럽에서 뿌린 임서희의 사진들이었다. 도시 전체의 대형 스크린에서 거의 10분 동안 사진들이 재생되었으니 자연스럽게 박충수의 눈에도 들어왔을 것이다. “할아버지.” 박도운이 입을 열자마자 박충수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지팡이를 짚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철썩. 이내 박도운의 준수한 얼굴에 새빨간 손자국이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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