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벼락을 맞은 듯 몸이 굳어졌다.
아들이 드디어 엄마 소리를 하는데 그게 다른 여자한테 하는 말이라니...
류가희가 그림책을 덮으며 말했다.
“이윤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왜요? 열 권은 읽어준다고 했잖아요.”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류가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박이윤은 임서희를 발견하고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신발을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운 씨가 오라고 했어요?”
가방을 챙기며 류가희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박 대표님이 제 사정을 아시고 아르바이트하라고 하셨어요. 시간당 200만 원 줄 테니까 이윤이한테 그림책을 읽어주라고요.”
“시급이 200만 원이요?”
임서희는 눈빛이 어두워졌다.
“류가희 씨, 도운 씨도 없는데 착한 척 그만하죠?”
“무슨 뜻이에요? 가난한 대학생이긴 하지만 난 돈 많은 남자한테 빌붙어 사는 부잣집 사모님들과 달라요. 그러니까 함부로 모욕하지 마세요.”
류가희는 박이윤을 내려다보며 억울한 듯 눈물을 글썽였다.
“이윤아, 네가 너무 좋지만 미안해. 더는 우리 이윤이랑 같이 시간 보내지 못할 것 같아.”
“엄마, 가지 말아요. 제가 있는 한 누구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
임서희를 쳐다보며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는 박도운 판박이였다.
“아줌마, 당장 가서 과일 씻어 와요.”
임서희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윤아, 저 여자는 이윤이 엄마가 아니야.”
“내가 누구를 엄마라고 부를지 그건 아줌마가 간섭할 일이 아니에요. 난 아빠 말만 들을 거예요.”
박이윤은 스마트 워치를 꺼내 박도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전화기 너머로 박도운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전 가희 선생님이 좋아요. 엄마라도 불러도 돼요?”
“그런 일은 네가 알아서 해.”
박도운의 대답이 거실에 울려 퍼지자 몸이 차갑게 식어버린 임서희는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이게 박도운한테는 별거 아닌 일이구나...’
그가 말한 서프라이즈가 이거인가 보다. 류가희를 아이의 엄마로 만들어 두 모자의 정을 완전히 끊어버리려는 속셈이겠지.
박이윤은 전화를 끊고 임서희를 노려보았다.
“아줌마, 아빠 말 들었죠? 아빠도 동의했어요. 얼른 가서 우리 엄마한테 과일 좀 씻어줘요. 아니면 아빠한테 아줌마를 쫓아내라고 할 거예요.”
아직 양육권을 얻지 못한 임서희는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씻어 올게.”
임서희가 씻은 과일을 내놓자 류가희는 과일 접시에 있는 배를 보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윤아. 아줌마는 내가 마음에 안 드나보다. 이만 가봐야겠어. 눈치가 보여서 말이야.”
“하지만 엄마...”
박이윤은 류가희를 잡으려고 했지만 류가희는 걸음을 재촉하며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 아줌마가 집에 있으면 선생님은 안 올 거야.”
그 말에 아이는 자리에서 굳어졌다. 정신을 차린 아이가 임서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림책을 집어 들어 임서희의 배를 향해 던졌다.
“아줌마 왜 그래요? 일부러 우리 엄마를 쫓아낸 거죠?”
임서희는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한때는 이곳에서 아들을 품고 있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그녀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박이윤, 네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너의 친엄마는 나야.”
“뭐라고요?”
한동안 멍해 있던 박이윤은 눈에 핏발이 섰다.
“감히 내 친엄마 행세를 해요? 아빠가 없으니까 내가 아빠 대신 아줌마를 혼내줄 거예요.”
아이의 모습에 임서희는 목이 메었다.
“내가 진짜 네 엄마야...”
말을 마치기도 전에 네 명의 경호원이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도련님, 말씀하세요.”
경호원들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자 눈시울이 붉어진 박이윤이 임서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아줌마 붙잡아요.”
임서희는 얼굴이 굳어졌다.
“이윤아, 이렇게 함부로 폭력을 쓰면 안 돼. 이건 잘못된 거야.”
그녀의 꾸지람에 박이윤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줌마가 정말 내 엄마인 줄 알아요? 이 세상에서는 오직 아빠만이 날 야단칠 수 있어요. 당장 아줌마를 별장 지하실에 가둬요.”
“작은 도련님...”
경호원은 안절부절못하였다.
“지하실은 박 대표님께서 오래된 술을 보관하는 데 쓰이는 곳이에요. 그 안에 산소가 부족해서...”
“아빠가 아저씨들을 경호원으로 발탁한 건 나한테 복종하라는 뜻이에요. 한마디만 더 하면 이 아줌마와 함께 지하실에 가둘 거예요.”
박이윤은 임서희를 반드시 혼내주겠다고 결심했다.
무정한 아들의 모습에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결과를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분명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고 박도운의 말만 믿을 것이다.
“아빠가 돌아오면 진실이 뭔지 물어봐.”
그러나 박이윤은 그녀의 말을 더는 듣지 않았다. 임서희는 경호원들에게 끌려 계단 아래에 있는 지하실로 갔다.
“사모님, 저희를 탓하지 마세요. 이건 작은 도련님의 명령입니다.”
경호원이 말을 마치고 지하실의 문을 닫자 어둠과 습기가 순식간에 그녀를 감쌌다.
열이 났던 임서희는 산소가 부족한 탓에 머리가 점점 무거워졌고 호흡도 점점 가빠졌다.
‘여기서 죽게 되는 걸까?’
한편, 마지막 회의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던 박도운은 본가에서 임서희가 한 행동이 떠올랐다.
그는 부하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류가희를 골드문으로 불러.”
그런데 류가희가 전화를 걸어왔다.
“박 대표님, 저 오늘은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에요. 오늘 사모님이 절 별장에서 쫓아냈어요.”
“뭐?”
박도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씀드렸지만 전 내연녀가 될 생각 없어요. 아르바이트라고 하셔서 갔던 건데... 사모님께서 그게 불쾌하셨나 봐요.”
“알았어. 내가 해결할게.”
전화를 끊고 박도운은 차에 올라탔다.
“별장으로 가.
30분 후, 박도운은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예전에는 이맘때면 임서희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늘은 집 안이 조용했다.
박이윤은 육아 도우미한테 바둑을 배우고 있었고 박도운이 돌아온 걸 발견하고는 눈에 띄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빠...”
“응.”
담담하게 대답하고 그는 아들을 지나쳐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실에도 서재에도 발코니에도 임서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녁도 안 하고 집에도 없고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임서희가 보이지 않자 박도운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한편, 지하실의 공기는 이미 희박해졌고 임서희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도운 씨...”
생존 본능에 온 힘을 다해 팔꿈치를 들어 한 번 또 한 번 머리 위의 차가운 철 뚜껑을 두드렸다.
퉁... 퉁...
힘이 약해서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끝없는 나락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힘이 빠진 임서희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죽으면 당신이 나 때문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아플까요?”
“당신은 아마 속이 시원하겠죠? 첫사랑도 류가희도 사랑할 수 있지만 오직 나에게만 정이...”
손이 힘이 쭉 빠진 그녀는 지하실의 차가운 계단에서 넘어졌다.
한편, 박도운은 별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임서희를 찾지 못했다.
시선을 피하던 박이윤의 모습이 떠올라 이내 아래층으로 내려가 도망치려던 아이를 덥석 붙잡았다.
“박이윤, 임서희는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