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결과를 기다리던 그 몇 초 사이, 신유리는 무심코 눈을 들었다가 허지연의 입가에 걸린, 미처 거두지 못한 득의의 미소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신유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신유리가 고개를 떨궈 확인한 순간, 눈에 들어온 건 잔인할 만큼 또렷한 두 줄이었다.
“쾅!”
욕실 문이 밖에서 거칠게 밀려 열렸다. 심명준이 들이닥치자마자 테스트기를 낚아채 갔다. 두 줄을 확인한 순간, 심명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들끓었다.
“신유리!”
심명준은 테스트기를 바닥에 내던지고 신유리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벽에 거칠게 밀어붙이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 무슨 핑계로 빠져나갈 건데? 변명해 봐!”
“이 결과는 너무... 이상해...”
신유리가 숨을 끊어 삼키며 몸부림쳤지만, 심명준의 손아귀는 더 단단해졌다.
심명준의 붉게 충혈된 눈을 마주한 순간, 신유리는 깨달았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거고 심명준은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실종됐던 3년을 딛고 돌아온 그날부터, 심명준 마음속의 신유리는 더는 예전처럼 티 하나 없는 신유리가 아니었다.
심명준은 허지연을 품에 안고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서도, 신유리에게는 단 한 치의 일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모순적인 감정이 신유리의 마음이 바닥까지 꺼졌다.
신유리는 하려던 말들도 모조리 삼켜 버렸다.
심명준은 신유리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속에서 질투라는 짐승이 미친 듯 울부짖는 걸 억누르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신유리가 다른 사람 품에 안겼을지도 모른다는 장면만 반복해서 번쩍였다. 그 상상 하나로 모든 걸 부숴 버리고 싶을 만큼 미쳐 갈 것 같았다.
“당장 지워.”
심명준은 이를 갈아 쥐어짜듯 내뱉었다. 목소리는 차갑고도 잔혹했다.
“그리고 내 옆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던 걸로 해 줄게.”
심명준이 한 박자 쉬었다가, 가장 비열한 카드를 다시 꺼냈다.
“잊지 마. 이명자 아줌마랑 아들도 아직 우리 쪽 사람이야. 계속 고집부리면...”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신유리의 심장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아 산산이 부서져서 얼음 조각처럼 차갑게 흩어졌다.
신유리는 한때 누구보다 사랑했던 심명준을 바라봤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너무 낯설었다. 허지연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신유리에게는 이토록 잔인했다.
심명준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의 차이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우스운 형태로 드러났다.
다행히도 신유리는 이미 깨달아 버렸다.
심명준에 대한 믿음 하나에 신유리는 인생 전부를 걸어 버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공해 위 멀리 떨어져 있을 이명자 아줌마를 떠올리는 순간, 신유리 어깨를 짓누르던 짐이 확 내려앉았다.
심명준이 당황해 굳어 있는 사이, 신유리는 천천히 웃음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벽을 힘껏 믿고 몸을 비틀어 심명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동시에 허지연을 거칠게 끌어당겨, 과도를 다시 허지연의 목에 바짝 갖다 댔다.
심명준이 반응할 틈도 없었다.
신유리는 허지연을 붙잡은 채 욕실을 뛰쳐나왔고, 경호원들이 달려들기 전에 이미 계단 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신유리!”
심명준이 뒤에서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넌 절대 도망 못 갈 거야!”
신유리는 돌아보지 않고 허지연을 끌어당긴 채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달렸다.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쇄골의 상처가 찢기는 듯 당겼고 눈앞이 까맣게 흔들렸다.
간신히 병원 뒷문을 뚫고 나왔지만,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얼마 못 가 신유리는 근처의 버려진 창고로 몰렸고, 그곳에서 경호원들에게 포위됐다.
잠시 뒤, 심명준이 사람들을 이끌고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유리야, 그만해. 말 잘 들어. 애를 지우고... 내 곁으로 돌아와.”
심명준은 마치 자비를 베푸는 사람처럼 덧붙였다.
“난 이 모든 걸 없던 일로 해 줄 수 있어.”
신유리는 고개를 떨궈 눈빛 속 조롱을 감췄다. 그리고 힘겹게 숨을 고르며 낮게 말했다.
“좋아. 그런데 지금은... 정말 힘이 없어. 몸 좀 추스르게 시간만 줘. 회복하고 나서 그럴게.”
뜻밖의 순순한 대답에 심명준이 잠깐 멈칫했다. 곧 뒤틀린 만족감이 얼굴에 번졌다.
심명준은 몸을 굽혀 신유리를 가로로 안아 들었다. 그 손길에는 잃었다가 되찾은 것처럼 과한 소중함까지 묻어 있었다.
“그래.”
심명준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기다릴게.”
심명준은 신유리가 결국 깨달을 거라고 믿었다.
‘유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건 나뿐이야. 유리는 언젠가 기꺼이 날 위해 남의 자식까지 지워 버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