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도주은은 마침내 나를 믿어 주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지안아, 너... 됐다, 정신 차린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지난 7년 동안 너는 연승훈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했어.” 나는 말이 없었다. 사랑하지만 얻지 못하는 마음이 가장 고통스럽다. 아파서 마음이 기울고, 기울어서 점점 더 미쳐 간다. 자존심 강한 나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오직 18살이던 그해에만 처참하게 졌다. 열여덟에서 스물다섯 사이의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생각하지 않아도 몹시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도주은, 나 좀 도와줘. 유씨 가문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도주은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 쉬었다. “그건 어렵겠네... 너는 이미 5년 동안 유씨 가문이랑 연락이 없었거든.” 그녀는 말을 아꼈고, 나는 그녀의 눈에서 동정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얼얼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 몸이 슬퍼한다. 안 슬플 수 있나? 그들은 내 가장 소중한 가족인데. 내 눈가가 붉어졌다. “주은아, 도와줘. 우선 오빠부터 연락하고 싶어. 오빠는 나를 가장 아꼈으니까...” 도주은의 얼굴빛이 변했다. “지안아, 내가 돕기 싫어서가 아니라... 네 오빠는 너를 만나지 않을 거야.” “어머, 우리 대단하신 사모님 아니세요? 어쩐 일로 여기서 이런 초라한 커피를 마시고 계시대요?” 비꼬는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도주은이 먼저 벌떡 일어났다. “박서연 씨, 경고하는데 시비 걸지 마요!” 우리 앞에 꽃무늬 원피스에 붉은 머리를 한 세련된 여자가 서 있었다. 얼굴에는 정교한 화장이 얹혀 있었고, 왼손에는 쇼핑백을 몇 개나 들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쪽에는 똑같이 멋을 낸 젊은 여자 두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박서연과 똑같았다. 나를 위아래로 깔보듯 훑었다. 나는 일어나 도주은의 팔을 끌었다. “나 어차피 저 사람 몰라. 우리 가자.” 도주은이 말하기도 전에, 박서연이 조롱을 한껏 끌어 올렸다. “어머, 저를 모르네요? 유지안 씨, 참 잘난 분이라 그런가 사람을 잘 잊으시네. 저랑은 오래된 사이잖아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박서연 씨, 저는 정말로 당신을 몰라요.” 박서연은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옆의 여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들었지? 내가 누군지도 모른대.”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맞장구를 쳤다. 그녀는 차유진이었다. “모르면 모르는 거지. 연승훈 대표한테 무릎까지 꿇는 사람은 우리도 굳이 알고 싶지 않거든.” 그들은 소리 내어 웃었다. 악의가 가득했다. 나는 얼굴을 굳히고 도주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가자. 저런 천한 사람들이랑 맞붙어 봐야 손해야.” 그 순간, 도주은이 폭발했다. 그녀는 박서연을 향해 말을 퍼부었다. “누구한테 천하다고 하는 거예요? 박서연 씨만큼 천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연승훈이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꼬셨죠. 그리고 차유진 씨, 댁은 재신 그룹 프로젝트 따 보겠다고 별수를 다 쓰며 연승훈한테 밥이랑 술을 퍼 날랐죠. 당신들이 제일 천해요! 집안 통째로 천하고요!” 도주은의 폭풍 같은 일침에 셋 다 멍해졌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박서연이었다. 그녀는 달려들어 도주은의 머리채를 잡으려고 했지만, 도주은의 전투력은 내가 어릴 때부터 보아 와서 잘 알았다. 해안시에서 도주은이 둘째라고 하면, 감히 첫째라고 나설 사람이 없다. 도주은은 테이블 위의 남은 커피를 들어 박서연에게 그대로 끼얹었다. 박서연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렸다. 차유진은 불같이 성을 내며 쇼핑백을 들어 도주은에게 내리치려 했다. 도주은이 눈치채지 못하길래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막았다. 쇼핑백이 내 팔을 강하게 때렸고 시큰한 통증이 번졌다. 도주은의 눈에 불이 일었다. “천한 삼총사가 감히 우리 지안이를 때리네요? 살기가 지긋지긋해요?” “그만!” 이때 누군가가 걸어왔다. 다음 순간 내 팔이 거칠게 비틀어졌다. 우지끈 소리가 들렸고, 격통에 나는 그대로 쭈그려 앉았다. 머릿속이 윙 하고 울릴 만큼 어지러웠고, 도주은의 놀라고 분노한 외침이 들렸다. “연승훈, 너 제정신이야? 왜 애꿎은 지안이를 붙잡아?” 나는 속으로 덜컥했다. ‘연승훈이 왜 여기에?’ 일어나려고 했지만 정신이 아득해지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때 누군가 잽싸게 나를 부축했다. 얼굴을 확인할 틈도 없이 온화하고도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그만해요. 지안이가 다쳤잖아요.” ... 정신을 차렸을 때, 머리 위 조명이 눈부시게 비췄다. “깼어?” 연승훈의 목소리가 곁에서 울렸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왼쪽 팔이 심하게 아파서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연승훈은 어두운 얼굴로 옆에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더디게 움직이는 것을 보더니 얇은 입술을 비스듬히 올렸다. “드디어 깼네. 조금 더 연기할 줄 알았는데.” 나는 잠깐 멍하다가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나는 좀 더 기절해 있어야 했지. 그래야 돈이라도 뜯어낼 수 있으니까.” 연승훈이 멈칫했다. 그는 아마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나를 혐오스럽게 바라보며 성급히 말했다. “유지안, 가서 사과해. 안 그러면 그 사람들이 경찰 불러서 너를 잡아갈 거야.” 나는 피식 웃었다. “왜 내가 사과를 해? 나는 아무도 때리지 않았어. 게다가 먼저 시비를 건 것도 그쪽이었고!” 나는 기억을 잃었을 뿐이지 멍청해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박서연을 기억하지 못해도, 도주은의 반응만 보면 셋이 어떤 부류인지야 뻔했다. 처음부터 박서연이 도발했고, 그다음에야 도주은이 반격했다. 나중에도 먼저 손을 쓴 것은 박서연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사과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어깨를 부여잡았다.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을 일관하며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아팠다. 어깨는 아마 탈골일 것이다. 그런데 내 앞의 남편이라는 사람은 상대에게 사과하라고 한다. 참 우스웠다. 나는 웃음까지 새어 나왔다. 내 웃음에 연승훈이 불끈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내 팔을 홱 잡아챘다. “유지안, 이제 그만해! 나는 이미 참을 만큼 참았어! 당장 돌아가! 밖에서 창피 좀 그만 줘!” 팔 쪽의 격통에 나는 비명을 질렀다. 연승훈은 아직도 반신반의하며 계속 말했다. “계속 연기해 봐. 너 멀쩡한 거 다 알아. 나랑 같이 가!” 두피가 터질 듯이 아팠다. 그 순간 나는 이 개 같은 남자와 같이 죽을 생각도 들었다. 상한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면 누군들 미치지 않겠나. “손 떼요, 지안이가 다친 거 몰라요?” 한 사람이 성큼 다가와 연승훈의 손을 제압했다. 연승훈은 그 아귀힘에 반사적으로 나를 놓았다. 나는 아파서 소리 내어 울었다. 그제야 연승훈이 이상함을 눈치챘다. 내 팔이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었다. 그 사람은 나를 부축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 병원으로 가자.” 익사 직전에 마지막 희망을 본 것처럼 나는 그를 꽉 붙들었다. 맑고도 온화한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훌쩍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내... 팔이 부러졌어요! 내 팔이 부러졌어요. 오빠, 나 오빠 찾아야 해요!” 며칠 동안 눌러 두었던 감정이 낯선 이의 배려 앞에서 순식간에 무너져 흘러넘쳤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릴 적 억울하면 오빠 유승기에게 달려가던 그때처럼 말이다. “오빠, 나 오빠 찾아야 해요. 오빠, 누가 나 괴롭혀! 다들 나를 괴롭혀! 하나같이 염치도 없이 나를 괴롭혀...” 연승훈은 멍하니 굳었다. 낯선 남자도 내 실성한 모습에 잠시 얼어붙은 듯했다. 나는 목 놓아 울었다. 아빠와 엄마가 그리웠다. 나를 가장 아껴 주던 오빠가 그리웠다. 내가 하늘이 무너질 실수를 했어도, 오빠는 나를 지켜 줄 것이다. 누가 나를 괴롭히면, 그는 목숨 걸고라도 나를 위해 싸워 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너무도 슬펐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을 실수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원수 같은 7년 동안,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내 손으로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