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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이때, 하지민이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왔나 봐.” 차건우는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날 미행한 거야?” 예전 같았으면 서아라는 해명하느라 급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민이 돌아온 이후로 이런 일이 무한 반복되었다. 이제 정말 지긋지긋했다. 비록 목숨을 대가로 정신을 차리게 되었지만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아라가 입을 열었다. “우리 이혼해.” 차건우는 어리둥절했다. “뭐라고?” 그리고 차건우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혼하자고.” 차건우의 표정이 대뜸 어두워지더니 냉소를 지었다. “꿍꿍이가 안 먹히니까 이제 이혼을 들먹여? 너랑 이런 유치한 장난에 놀아날 시간 없어.” 옆에 서 있는 하지민도 비아냥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입을 가리고 피식 웃었다. “아라 씨, 밀당은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시도 때도 없이 이혼으로 협박하면 오히려 역효과일 텐데, 그런 말 할 시간에 차라리 정성이나 더 보여줘요. 이혼 운운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어요?” 차건우도 서아라의 수작이라고 여긴 듯 쌀쌀맞게 받아쳤다. “다시는 날 따라다니지 마. 구질구질한 여자는 딱 질색이니까.” 하지민이 능청스럽게 한마디 거들었다. “어쩌면 아라 씨도 그냥 관심을 끌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잖아.” 서아라가 콧방귀를 뀌었다. “진짜 이혼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밀당하려는 건지 두고 보면 알겠지?”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둘이 서로 좋아 죽는 거 같길래 이만 빠져주겠다는데 별로 기뻐 보이진 않네?” 차건우는 서아라가 진심으로 이혼을 원할 리 없다고 여겼다. 단지 그를 위협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다고 생각에 괜히 혐오감만 더 깊어졌다. 새까만 눈동자가 마치 얼음장처럼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소용없어. 너란 여자가 점점 더 싫어질 뿐이니까.” 단호한 표정의 남자를 보자 서아라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과거에 얼마나 비굴했으면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을 그저 비위 맞추려는 몸부림쯤으로만 여기는 걸까? 서아라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럼 두고 보자고.” 그녀는 속으로 결심했다. 이혼 서류가 완성되는 날, 이 남자의 얼굴에 냅다 던져주리라고. ... 1층으로 내려가자 정윤혁의 차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어두운 안색의 그녀를 보더니 피식 웃으며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 누가 너 기분 상하게 했어?” 서아라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차건우랑 첫사랑 년을 마주쳤어.” 정윤혁이 알겠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협상 결렬된 거야?” “이혼하겠다고 하니까 안 믿던데?” “유산한 건 말할 생각 없고?” 아이를 언급하자 서아라의 가슴이 찌르르 아파져 왔다. 이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응.” 설령 얘기한다고 해도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자격도 없는 주제에 임신한 자체가 잘못이라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스스로 굴욕을 자처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녀가 차 문을 닫자 정윤혁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차건우랑 살던 신혼집?” 이제 와서 ‘신혼집’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자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아니.” 그리고 잠깐 고민했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로 데려다줘. 몸 좀 회복되면 그때 별장에 짐 정리하러 갈게.” 정윤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달에 고덕수 회장님 팔순 잔치가 있는데 엄마 아빠가 인사도 드릴 겸 같이 가자고 하시네.” 이내 뜸을 들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서준도 얼마 전에 귀국했더라. 마지막으로 본 지 꽤 됐지? 너도 갈래?” “서준 오빠가 돌아왔다고?” 고서준의 이름이 거론되자 서아라의 표정이 그제야 누그러졌다. “응. 같이 가.” 어릴 적 두 집안은 이웃이었고, 고서준과 함께 자라 말 그대로 소꿉친구였다. 나중에 서씨 가문이 승승장구하면서 가족 전체가 해외로 이주했다. 서아라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 자신을 괴롭히면 언제나 제일 먼저 나타나 그녀를 지켜주었던 사람을. 예전엔 차건우 하나만 바라보느라 인간관계도 다 포기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 놓쳤던 모든 것들을 되찾을 것이다. ... 한 달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정윤혁은 전문 의료진을 고용해 서아라의 몸을 정성껏 돌봐주었고, 아무런 후유증도 남지 않도록 했다. 그동안 차건우는 내내 외박했고 전화는 물론 문자 한 통도 없었다. 서아라는 휴대폰 메시지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일방적으로 보낸 문자들이 슬프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빽빽하게 채워진 대화창은 온통 그녀 혼자만의 독백이었다. 차건우는 답장조차 안 했다. 어쩌면 애초에 확인할 생각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서아라는 점점 이 결혼에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았다. 이때, 정윤혁이 연락이 왔다. “아라야, 준비 다 했어? 고 회장님 생신연이 곧 시작될 거야.” 서아라는 대답하고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뻥 뚫린 도로를 타고 순조롭게 연회장에 도착했다. 고씨 가문은 Z국에서 유서 깊은 학자 집안으로 세계에 기여한 많은 유명 인사를 배출해냈다. 고덕수 역시 젊었을 때 전공을 세워 크게 활약했고 많은 이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많은 고위 관리와 권력자들이 인연을 맺고 싶어 했지만 워낙 뚝심이 강한 사람이라 줄서기 하거나 뒷거래는 극혐했다. 이러한 이유로 고씨 가문은 Z국 내에서 아주 특별한 지위에 있다. 따라서 초대받아 생신연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큰 영광으로 여겨졌다. 초대장을 건넨 후 서아라와 정윤혁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정윤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발신자 이름을 힐끗 보고는 서아라에게 말했다. “아라야, 여기 잠깐 있어. 통화하고 금방 올게.” 서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윤혁이 자리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아라 씨! 병원에 따라온 것도 모자라 이런 중요한 연회까지 쫓아오면 어떡해요?” 고개를 돌리자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를 부축한 채 다가오는 하지민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차건우의 할머니, 이명희였다. 노인은 매서운 눈빛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내 서아라가 입고 있는 값비싼 드레스에 시선이 닿자 눈을 가늘게 뜨며 버럭 화를 냈다. “넌 왜 이렇게 눈치가 없니? 건우가 회사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데 어떻게 그런 돈을 흥청망청 써대는 파렴치한 짓을 할 수 있지?” 이명희는 씩씩거리며 손가락질했다. “당장 그 드레스 벗어서 지민한테 줘!” 나이만큼이나 눈썰미도 예리한 사람인지라 서아라가 입은 드레스가 최소 억대는 된다는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물론 차씨 가문 같은 재벌가에게 푼돈에 불과했으나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랐다. 서아라 같은 년한테 이런 화려한 드레스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노발대발하는 이명희를 보고도 서아라는 무덤덤했다. 차건우와 결혼한 지난 3년 동안 이명희에게서 수없이 많은 모욕과 억압을 당해왔다. 가장 끔찍했던 건 결혼 초였다. 당시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를 본가로 불러들여 가문의 규율을 운운하며 괴롭혔다. 빨래와 끼니, 온갖 집안일을 시키는 것은 물론 가족 모임에서 여자의 겸상을 금기시하며 식사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했다. 친척이 모이는 날이면 서아라는 늘 제일 바빴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심부름하느라 하인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아무리 비굴하게 비위를 맞춰준다고 해도 이명희는 여전히 성에 안 차는 듯 폭행과 폭언을 일삼았다. 말대답하거나 반항이라도 하면 무례하다는 둥, 불효라는 둥 눈총을 받기 마련이었다. 이제 와서 과거를 회상하니 마치 악몽 같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서아라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이내 차가우면서도 우아한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명희를 쳐다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제가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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