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고개를 돌리자 잘생기고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서준 오빠?”
“아까 멀리서 보고 너랑 좀 비슷해서... 설마 했는데 진짜 너였구나.”
고서준은 앞에 멈춰서서 착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 다시는 안 올 줄 알았어.”
서아라가 결혼하기 전 고백을 한 적이 있었고, 당시 차건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충고도 해주었다.
하지만 그때 서아라는 오로지 차건우와 결혼하겠다는 마음뿐인 지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후 고서준은 해외로 떠났고, 그녀도 연락을 끊었다.
얼마 전 정윤혁의 한마디에 문득 깨닫게 되었다. 차건우를 위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친오빠처럼 곁에 있어 준 사람조차 놓쳤던 것이다.
고서준을 다시 마주하게 되자 죄책감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도련님.”
곁에 있던 집사가 고서준을 보자마자 공손하게 인사했다.
고서준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집사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금 이 분이 초대장도 없이 연회에 참석했다고 하더군요. 회장님의 철칙은 도련님께서도 잘 아시잖습니까.”
하지민과 이명희는 고서준과 서아라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린 하지민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고서준 씨가 어떻게 서아라 같은 여자를 알죠?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고서준이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지인을 못 알아볼 정도로 눈이 나쁘진 않아요. 그나저나 ‘서아라 같은 여자’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네요.”
이명희가 비아냥거렸다.
“남자한테 빌붙어 부잣집에 시집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뻔뻔스러운 여자죠. 일도 안 하고 우리 손자 돈만 축내면서 치장하고 돌아다니니, 얼마나 천박하고 한심한지 몰라요. 고서준 씨도 저런 여자한테 속지 마세요.”
고서준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사님은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금인지 똥인지도 구분 못하시는 것 같네요. 뭐, 이해는 합니다.”
그리고 차건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만 차건우 씨도 눈이 많이 어두운가 보네요. 자기 아내도 모를뿐더러 초대장이 없다며 내쫓으라고까지 하다니.”
말을 마치고 하지민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조롱이 묻어났다.
“그동안은 여자 한 명으로만 부족한 줄 알았는데 눈썰미까지 꽝이었군요.”
집사는 어리둥절했다.
눈앞의 여자가 차건우의 아내라니?
아까만 해도 노부인을 부축하고 있는 여자가 부인이라고 생각했다.
‘뭐야? 내연녀였어?’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와이프는 나 몰라라 하고 애인부터 챙기다니, 어찌 이렇게 후안무치할 수 있지?
대부분 겉으로라도 아내와 사이좋은 척하기 마련인데,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차건우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지민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서준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우리 할아버지 생신 잔치에 그쪽을 초대한 기억은 없거든요? 물론 초대장이 있으면 가족을 동반해도 되지만 아무리 봐도 차씨 가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고서준이 집사를 향해 눈짓하자 그는 잽싸게 하지민 앞으로 다가갔다.
“이만 나가주시죠.”
경멸이 담긴 눈빛으로 냉소를 짓는 집사를 보자 하지민은 가슴이 미어졌다.
이내 차건우를 바라보며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우야...”
차건우가 입을 떼려는 순간 고서준이 무심하게 끼어들었다.
“본인이 이 사달을 냈으니 당연히 규칙을 잘 알고 계시겠죠? 설마 내로남불하는 건 아니죠?”
차건우가 어두운 안색으로 하지민을 향해 말했다.
“지민아, 먼저 집에 가 있어.”
하지민은 속으로 내키지 않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어 아쉬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하지민이 떠난 뒤 차건우는 서아라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고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지하려고 하자 서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차건우는 눈짓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안색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
이내 서아라를 뒤뜰로 끌고 가더니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이혼 소동에 밀당으로 내 관심 끌어보겠다? 서아라, 수법이 이리 뻔해서야 되겠어?”
“밀당? 네 관심을 끈다고? 자기가 뭐 대단한 사람인 줄 아나 봐?”
서아라는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듯 코웃음을 쳤다.
“나르시시즘도 병이야. 치료받아.”
달빛 아래 조각처럼 완벽한 남자의 이목구비가 어딘가 음울하게 느껴졌다.
차건우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때 우리 할아버지한테 접근해서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나랑 결혼하려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차무현을 언급하자 서아라는 마음이 무거웠다.
당시 심장병으로 쓰러진 노인을 우연히 구해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차건우의 할아버지였다.
차무현은 그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어떻게든 차씨 가문의 손주며느리로 만들고 싶어 했다.
게다가 오로지 차건우를 위해 S시에 왔는지라 당시만 해도 첫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차무현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약을 먹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억지로 혼인신고까지 시키고 차무현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전,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생각해낸 방법이라고 했다.
비록 차무현이 그들을 모함하긴 했으나 집안을 통틀어 자신을 가장 예뻐한 사람이기도 했다.
나중에 입이 아프도록 해명했지만 차건우는 끝까지 그녀가 일부러 차무현에게 접근해 덫을 놓았다고 믿었다.
어차피 지난 일이라 설명할 생각도 없었다. 이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땐 내가 눈이 멀어 정신이 나갔나 봐. 이젠 현실을 직시했으니까 더 이상 한 나무에 목매진 않아.”
그리고 빨간 입술로 호를 그리며 요염한 미소를 짓더니 의미심장하게 어딘가를 흘끗 쳐다보았다.
“특히, 썩은 뿌리를 가진 나무라면 더더욱. 병이라도 옮을까 봐 무섭거든.”
차건우는 황당해서 웃음을 터뜨렸다.
“미쳤네, 이렇게 해서라도 나한테 들이대고 싶은 거야? 그런 말 한다고 내가 널 건드릴 것 같아?”
서아라는 어이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그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것으로만 받아들였다. 자아도취에 빠진 남자를 상대로 대체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서아라는 더는 시간 낭비하기 싫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랑 하지민 사이에 있었던 일, 나도 알고 있어. 어차피 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둘이 만나기로 한 이상 그냥 빨리 이혼하는 게 낫잖아. 나중에 기자한테 사진이라도 찍혀서‘불륜녀’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큰일일 텐데.”
남자의 깊은 눈동자에 싸늘한 혐오가 어렸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제 스토킹에 피해망상까지? 정말 갈수록 가관이네.”
“헛소리? 피해망상?”
서아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일은 저질러놓고 인정은 못 하겠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