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마치 적선을 베푸는 듯 차건우의 거만한 태도에 서아라는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이 결혼... 꼭 끝낼 거야.”
그리고 말을 마치고 뒤돌아 떠났다.
...
서아라는 뒤뜰을 한 바퀴 돌았다.
연회장에서 망신당한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지민을 혼자 보낸 게 마음에 걸렸는지 다시 돌아갔을 때 차건우와 이명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윤혁도 이미 복귀했다.
서아라는 정윤혁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까 어디 갔었어? 왜 그렇게 오래 걸렸대?”
“고 회장님 잠깐 뵙고 왔어.”
정윤혁은 서아라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까 일어났던 일은 나도 전해 들었어. 서준이가 나서서 다행이야.”
서아라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
“설마 일부러 자리를 비웠어?”
정윤혁은 웃기만 할 뿐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 절호의 찬스는 아무래도 서준한테 양보하는 게 낫지. 차건우가 우리 동생이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 못 받는 줄 알면 곤란하잖아.”
“오빠, 언제부터 이렇게 유치해졌어?”
서아라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 서준 오빠를 이성으로 안 보는 거 알잖아. 그냥 오빠 같은 사람이야.”
정윤혁이 눈썹을 까딱했다.
“오빠는 나 하나면 충분하지. 뭐 하러 그리 많이 필요해?”
서아라가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잽싸게 끼어들었다.
“그건 그렇고, 지난 3년 동안 손 놓고 모든 일을 나한테 떠넘겼으니 이젠 다시 회사에 돌아올 때도 됐잖아?”
정윤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라야, 네가 차건우 때문에 집을 나간 이후에도 부모님의 걱정은 여전하셔. 두 사람이 사이가 안 좋다는 거 뉴스에서 보고 날 보낸 거야. 네 편 좀 들어주라고.”
“편들어주라니?”
정윤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씨 가문이 우리 집안만큼 크고 잘 나가진 않아도 Z국에선 무시 못 할 영향력을 가지고 있잖아. 네가 결혼할 때 홀몸으로 들어가서 혹시라도 홀대당할까 봐 엄마 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래서 차건우한테 큰 프로젝트 하나 넘겨주라고 하셨어. 이참에 대진 그룹도 전부 네 손에 맡기고.”
서아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태성 그룹과 이미 계약한 거야?”
정윤혁이 큰 프로젝트라고 말할 정도면 결코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정씨 가문 같은 재벌가조차 가볍게 다룰 수 없는 대형 계약일 가능성이 컸다.
정윤혁은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
“네가 나한테 전화하기 바로 전날에 계약이 마무리됐어. 원래는 너랑 차건우한테 서프라이즈로 알려주려고 했지만...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지.”
서아라는 침묵을 지켰다.
“차건우랑 곧 이혼할 텐데 그래도 협력은 계속 해야 하는 거야?”
정윤혁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성 그룹은 최근 몇 년 사이 성장세가 좋아. 차건우 또한 유능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고. 엄마 아빠도 당시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다고 후회할 정도니까.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보상으로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넘겨준 거고. 일단 계약을 어기면 대진 그룹의 절반을 태성 그룹이 먹는 꼴과 마찬가지야.”
서아라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미안해. 그땐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엄마 아빠 많이 속상하셨을 텐데.”
정윤혁은 그녀를 나무랄 뜻은 없어 보였다.
“그깟 프로젝트 하나 갖고 뭘. 이미 줬으면 끝난 거지. 그나저나 차건우랑 얘기는 좀 해봤어?”
서아라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혼 안 하겠대.”
“왜?”
서아라는 전후 사정을 차분히 설명했다.
끝까지 들은 정윤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Z국이잖아. 본인이 이혼을 원치 않은 이상 솔직히 어쩔 도리가 없긴 하지. 근데 네 말 들어보니까 3년 기한이 끝나면 그때 가서 이혼하겠단 거야?”
서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윤혁은 생각에 잠겼다.
“약속 기간까지 석 달밖에 안 남았잖아. 지금 당장 이혼을 요구해도 숙려기간이 한 달 필요해. 만약 소송으로 가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중간에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몰라.”
이내 서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리 3개월만 참는 게 어때?”
Z국은 결혼에 굉장히 보수적인 나라였다. 부부 사이가 아무리 안 좋아도 한쪽이 이혼을 반대하면 쉽게 판결하지 않았다.
서로 끌고 다투고, 별거하고, 절차까지 밟으면 적어도 2년은 넘었다.
세 달만 참는 게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어차피 차건우도 자주 집에 오는 것도 아니니 더 버틴다고 해서 안 될 건 없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결국 차건우만 좋은 노릇이었다. 나중에는 정씨 가문에서 받은 프로젝트로 돈을 벌어 하지민이나 먹여 살릴 게 뻔했다.
차건우를 만나기 전만 해도 똑 부러지는 그녀였는데...
생각에 잠긴 서아라를 보자 정윤혁이 말했다.
“계약 체결 당일에 하지민이라는 여자가 차건우의 비서라면서 옆에 딱 붙어 있는 걸 봤어.”
이내 넌지시 제안했다.
“나도 계약만 마무리하면 어차피 너한테 인수인계할 생각이었어. 아라야, 당장 이혼도 못 하는데 차라리 그동안 복수부터 먼저 하는 건 어때?”
서아라는 정윤혁을 힐긋 쳐다보았다.
“오빠는 그냥 일 더 하기 싫으니까 그럴듯한 핑계 대는 거잖아.”
친남매로서 정윤혁이 얼마나 계산적인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속내를 들켰는데도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넌 벌써 3년 넘게 쉬었잖아. 나도 숨 좀 돌리자. 3개월 정도는 이해해줘야지.”
서아라는 알고 있었다. 정윤혁은 어디까지나 그녀를 위해 찾아왔고, 부모님도 이번 일을 핑계 삼아 이제 집으로 불러들일 작정이라는 걸.
자신의 고집에서 비롯된 결과인지라 남이 뒷수습까지 대신해줄 이유는 없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
다음 날, 서아라는 정윤혁과 약속 시간을 정한 뒤 옷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들렀다.
차건우는 늘 그녀가 돈을 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과 결혼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었던 나머지 지난 3년 동안 옷이나 액세서리를 최소한만 구매했다. 자칫 오해라도 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끼며 살았는데도 차건우의 눈에는 여전히 돈밖에 모르는 여자로 비쳤다.
백화점에서 서아라는 옥팔찌 하나를 착용해 보고 있었다.
옥팔찌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액세서리였다.
차건우와 결혼하기 전 집에 소장한 것만 해도 수두룩했고, 하나하나가 최소 몇십억이 넘었다.
지금은 아직 차건우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라 너무 눈에 띄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4억짜리 팔찌 하나를 골라 시착해 보았다.
점원은 팔찌를 살펴보는 서아라의 동작이 능숙하고 자연스러운데다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고급스러운 품격이 느껴지자 큰손 고객이라 여겨 더욱 열정적으로 응대했다.
서아라가 팔찌를 벗고 점원에게 포장해 달라고 말하려던 찰나 갑자기 등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살 형편도 안 되면서 구경은 왜 한대? 여기가 개나 소나 올 수 있는 곳인 줄 아나 봐. 굳이 시착까지 할 필요 있나? 팔찌가 격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리고 멈칫하더니 다시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여기, 이 팔찌 세척 좀 해줘. 우리가 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