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나는 내 남편 한서준에게 세상 끝까지 증오하는 전처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한서준은 예전에 이렇게 말했다.
“정씨 가문이 내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어. 나는 정초아를 차라리 죽는 것만도 못하게 만들 거야.”
첫째 날, 한서준은 정초아가 타 온 커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온갖 트집을 다 잡았다.
다시 타 오라고 열 번 넘게 시켰고, 정초아는 뜨거운 커피를 들고 들락거리다가 결국 손등이 데여 물집이 잔뜩 올라왔다. 그제야 한서준은 겨우 그만하라고 했다.
둘째 날, 부서 회의 자리에서 한서준은 정초아가 밤새 준비한 기획안을 사람들 앞에서 한심할 정도로 깎아내렸다. 회의실 가득 퍼진 웅성거림 속에서 정초아의 얼굴은 점점 새하얗게 질려 갔다.
셋째 날, 한서준은 가장 까다롭고 고객도 제일 악명 높은 남성 프로젝트를 정초아에게 떠넘겼다. 안진성 대표가 어떤 인간인지 뻔히 알면서도 정초아에게 사흘 내내 술자리에 나가 접대를 하라고 밀어붙였다.
정초아가 일곱 번째로 커피를 들고 그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나는 결국 더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무심한 척 책상 옆을 지나가다가 슬쩍 한서준의 소매를 붙들었다.
“당신은 정초아한테... 정말 복수만 하려는 거야?”
...
한서준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순간, 눈빛이 금세 부드러워졌다.
한서준은 내 귀 옆으로 흘러내린 잔 머리카락을 스치듯 쓸어 올리며 낮게 말했다.
“그래, 하린아. 이 모든 건 정초아가 받아 마땅한 벌이야.”
정초아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정초아의 시선이 가볍게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 눈빛에는 분노도 없었고 오히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동정과 비아냥만이 어렸을 뿐이다.
정초아가 돌아서서 병실을 나가자 한서준의 시선은 한동안 정초아가 사라진 방향에 그대로 붙어 있었고 좀처럼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 순간, 가슴이 가느다란 바늘로 빽빽하게 찔리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나는 미움이라는 이름을 쓴 사랑이야말로 사람 가슴을 가장 깊이 후벼 판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 한서준은 드물게도 칼같이 퇴근해 나와 저녁을 함께 먹어 주었다.
식사가 한창일 때, 식탁에 올려둔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한서준은 잠깐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어나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
“회사 쪽에 급한 일이 좀 생겼어. 나 잠깐 다녀와야겠다.”
한서준은 겉옷을 집어 들면서도 말투만큼은 늘 그랬듯 평온했다.
하지만 나는 한서준의 눈동자에서 스쳐 지나가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
그 표정은 정초아의 이야기가 나올 때만 볼 수 있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그날 밤, 한서준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조바심을 애써 누르며 기다리고 있을 때 비서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비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서준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고 말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집을 뛰쳐나와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익숙한 정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브레이크는 내가 손을 썼어. 대충 핑계 하나 댔을 뿐인데, 이렇게 한밤중에도 바로 달려올 줄은 몰랐네.”
정초아의 목소리는 대수롭지 않은 듯 가볍고 거만했다.
“궁금하잖아. 네가 과연 이번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곧이어 더 낮고, 더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서준, 네 서재 금고 안에 왜 아직도 우리 사진이 다 들어 있는 거지? 나를 그렇게 미워하면서, 사진 한 장 버리지 못한 이유가 뭐야?”
가슴 한가운데서 둔탁하던 통증이 날이 선 칼로 바뀐 듯, 마음을 마구 후벼 팠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나는 문을 와락 밀어 제꼈다.
안으로 들어가자, 한서준이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마에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고, 왼팔에는 두꺼운 깁스를 하고 있었다.
침대 옆에는 정초아가 서 있었다.
정초아는 화사하고 도발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온몸이 떨렸다.
“정초아, 이건 명백한 살인 미수야! 경찰 부를 거야!”
나는 휴대폰을 꺼냈지만 그 순간 한서준의 날카로운 호통이 나를 꽂아버렸다.
“하린아, 신고하지 마!”
한서준은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상체를 곧게 세웠고 오직 정초아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나하고 정초아 사이의 문제야. 네가 끼어들 필요 없어.”
정초아는 낮게 웃음을 흘리더니 침대에 더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굽혀, 한서준의 귀에 들릴 듯 말 듯 무언가를 속삭였다.
순간, 한서준의 눈빛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 눈빛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노와 욕망이 뒤섞인 이상한 빛이었다.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며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서준아, 정초아가 한 짓은 분명 범죄야.”
나는 필사적으로 한서준을 설득하려 했지만 한서준은 내 말을 차갑게 끊었다.
“말했잖아. 신고하지 말라고. 나가.”
나보고 나가라는 말은 내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 같았다.
정초아는 두 팔을 가볍게 끌어안고 서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정초아의 눈빛에는 이미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한 기색이 번쩍거렸다.
바로 그때, 간호사 한 명이 서류봉투를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공기가 그제야 조금 풀렸다.
“보호자 분께서 입원 절차 좀 밟아 주세요.”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앞으로 나가려다 한서준이 무심코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손끝이 또렷하게 향한 곳은 내가 아니라 정초아였다.
“초아야, 네가 갔다 와.”
한서준의 낮은 목소리에는,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한 듯한 부름이 담겨 있었다.
입술 사이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초아라는 이름이 공기 중에서 맴돌며, 순간 병실 안의 모든 소리를 삼켜 버린 것 같았다.
그제야 한서준 역시 자신도 놀란 듯했다.
방금 자신이 무심코 한 선택이, 본인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이었다는 걸 눈치챈 듯,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한서준은 곧 서둘러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색하게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내 말은... 이번 사고는 애초에 정초아가 저지른 일이니까. 이런 자질구레한 심부름 정도는 정초아가 하는 게 맞다는 뜻이야.”
한서준은 잽싸게 말을 수습했다.
하지만 그 짧은 머뭇거림과, 무의식적으로 먼저 정초아를 지목했던 그 한순간이, 차가운 칼날이 되어 내 가슴 속을 정확하게 찔러 버렸다.
애써 눈감고 모른 척하며 쌓아 올렸던 모든 핑계와 위로가 내 마음속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앞으로 내밀었던 나의 손이 공중에서 굳어 버렸고 손끝까지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어 왔다.
“그래.”
나는 내 목소리가 아주 작게, 겨우 들릴 만큼만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문이 닫히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지켜오던 감정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
아무도 내가 꼬박 7년 동안이나 한서준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나는 병원 복도 끝에 서서 기운이 빠진 사람처럼 벽에 몸을 기대었다.
7년 전, 학교 창립 기념식 날.
한서준은 모교로 돌아와 우수 동문 자격으로 연단에 올랐다.
단상 위의 한서준은 고급스럽고 여유로웠다.
단상 아래의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그 후, 집안의 인맥을 통해 나는 겨우 한서준의 인맥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서준과 정초아가 서로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다시 한서준의 부모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그들의 결혼이 산산이 부서져 가는 전 과정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보았다.
정씨 가문이 한서준 부모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뒤로, 한서준의 가슴 속에는 정초아를 향한 증오가 깊이 박혀 버렸다.
이혼 후, 한서준에게 가장 어두웠던 그 시기 내내 곁을 지킨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3달 전, 마침내 한서준이 나에게 청혼했고 나는 그제야 한서준이 과거를 내려놓았다고 믿었다.
그런데 결혼한 지 딱 99일째 되는 날, 한서준은 직접 정초아를 회사로 데려왔다.
인턴이라는 명목으로 자기 사무실 안에 자리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서준은 정초아를 향해 온갖 괴롭힘을 다 했다.
정초아가 타 온 커피를 일부러 엎질러 버리고, 사람들 앞에서 실력을 깎아내리고, 가장 힘들고 까다로운 고객만 골라 떠맡겼다.
하지만 등만 돌리면 한서준은 직접 정초아의 사무실을 꾸미고, 서랍 속에는 해장제와 화상 연고를 챙겨 넣어 두었다.
지난달에는 술자리에서 정초아가 안 대표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한서준은 60억 계약이 걸린 서류를 책상 위에 던져두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말 한마디 예고도 없이 바로 술집 방으로 들이닥친 한서준은, 집어 든 술병을 안 대표의 머리 위로 그대로 내리쳤다.
그 후로도 매번 정초아가 전화 한 통만 걸면, 시간이 밤이든 새벽이든,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이 한서준은 가장 먼저 정초아에게로 달려갔다.
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 날, 식탁 위에는 음식들이 따뜻하게 놓여 있었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한서준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나한테 설명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잊은 채, 코트만 집어 들고 허겁지겁 나갔다.
나는 나중에야 정초아는 그날 밤에 그저 술에 취해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가운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나는 무심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언제부터였는지 눈물이 이미 얼굴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곧장 한서준의 서재로 향했다.
금고를 열었을 때, 나는 그 안에서 밀봉된 상자 하나를 찾아냈다.
비밀번호는 정초아의 생일이었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한서준과 정초아의 사진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맨 위에 놓인 사진 한 장은 교통사고가 나기 바로 전날 밤 찍은 사진이었다.
술집 문 앞에서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사진 속 정초아는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고 한서준이 정초아를 바라보는 눈빛은 내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깊고 뜨거운 시선이었다.
사진 뒷면에는 힘 있는 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너를 미워하지만 그래도 너만 원해.]
알고 보니, 미움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그 사랑은 줄곧 한서준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할아버지한테서 걸려 온 해외 전화였다.
휴대폰 액정에 비친 창백한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할아버지.”
쉰 목소리가 낯설 만큼 갈라져 나왔다.
“저... 이미 결심했어요. 외국에 나가 있을게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안심하는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내 마음은 보이지 않는 손에 꽉 움켜쥐어진 것처럼 아려 왔고 숨 쉬기가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한서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네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나도 이제는 더 이상 바라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