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나는 금고에서 한서준이 이미 사인해 둔 이혼 서류를 꺼냈다. 그 순간 심장 한가운데가 콕 하고 찌르듯 아려 왔다.
한서준은 예전에 결혼 생활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이 서류가 평생 필요 없을 거라고, 그저 장식처럼 금고에 박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고작 99일 만에, 이 서류를 꺼내 들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서류 마지막 장에 내 이름을 또박또박 적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서진수 변호사의 번호를 눌렀다.
“저... 한서준 씨와 이혼하고 싶어요.”
전화를 끊고 방으로 돌아오자, 나는 묵묵히 캐리어를 꺼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옷장을 열어 내가 가져온 옷들을 하나하나 캐리어에 넣고 나서야 깨달았다.
정말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이 얼마 없었다.
한서준의 삶에서 나라는 사람을 떼어 내는 일은 생각보다 너무도 간단했다.
마치 스티커 하나 쓱 떼어내듯이 말이다.
나의 시선이 머리맡에 걸린 결혼사진으로 옮겨졌다. 사진 속의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활짝 웃고 있었다.
마치 오랜 싸움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둔 사람처럼, 눈부시게 웃고 있었지만, 한서준은 그 옆에서 옅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미소였고, 그냥 평범한 증명사진이나 찍는 사람처럼 담담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한서준이 나를 선택한 건 단지 어떤 순간의 감동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이유였을지언정 사랑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액자를 떼어 내려는 순간, 휴대폰 벨 소리가 불쑥 울려 퍼졌다.
“사모님, 한 대표님의 갈아입을 옷은 여사님만 어디 있는지 아시잖아요. 병원 쪽으로 한 번 가져다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차는 이미 집 앞에 대 놓았습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 알겠어요.”
한서준은 늘 상대가 고민하거나 망설일 여지를 애초에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문득, 한서준이 나에게 청혼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한서준은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목소리는 술기운에 쉬어 있었고, 눈빛은 피곤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윤하린, 우리 결혼하자.”
짧디짧은 그 한마디에, 나는 숨이 멎는 것처럼 마음이 요동쳤다.
하지만 그날, 우리 앞에는 꽃다발도 없었고 반지도 없었다.
로맨틱한 말 한마디나 이벤트 하나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게 과연 청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순간이었을까.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정초아는 마치 날카로운 발톱을 잠시 감춰 둔 맹수처럼 침대 곁에 엎드린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한서준은 그런 정초아를 깊은 눈으로 가만히 내려다보며 손가락 끝으로는 정초아의 볼 윤곽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바람이 살짝 스며들었고, 곧 한서준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정초아, 난 너를 뼛속까지 미워하는데도... 이상하게, 너한테 손가락 하나 대는 것도 못 하겠어.”
그 말에 숨이 턱 막힌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병실 문을 힘껏 밀어 열었다.
문이 쾅 하고 열리자 한서준은 화들짝 놀라 손을 황급히 거두었다.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나는 손에 든 옷 가방끈을 꼭 쥔 채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박 비서가 옷 좀 가져다 달라고 해서.”
한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내 얼굴에 특별한 동요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한서준은 정초아 쪽을 향해 표정을 바꿨고 죄인을 내려다보듯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 여자를 당장 끌어내.”
호출벨을 누르자마자, 보디가드 둘이 재빨리 들어와 정초아의 양팔을 붙잡고 끌고 나가려 했다.
그때까지 눈을 감고 있던 정초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붉은 입술이 비웃듯 올라가더니, 갑자기 몸을 틀어 한서준의 어깨를 거칠게 붙들었다.
“한서준, 나 방금까지 계속 깨어 있었어. 네가 방금 무슨 말 했는지, 다 들었거든.”
한서준의 눈에 잠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한서준은 성급하게 정초아의 손을 뿌리치더니, 아주 짧게 숨을 고르고 나서야 나를 향해 돌아섰다.
“아까 정초아한테... 내가 죽여 버리겠다고 말했어.”
나는 가방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을 잘랐다.
“그래? 알겠어.”
등 뒤에서 한서준의 시선이 오래도록 내게 꽂혀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한서준과 정초아 사이의 사랑이든 증오든, 더 이상 신경 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퇴원하던 날, 한서준의 시선은 여전히 정초아에게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병원에서 며칠 내 옆에 붙어 있었다고 해서 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너랑 나 사이는... 끝까지 가볼 거야.”
이 말을 남기고, 한서준은 보디가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뒷좌석에 태워. 꽉 잡아 두고.”
정초아는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 치며 악을 썼다.
“한서준, 가식적인 놈아! 이건 불법 감금이야. 당장 놔!”
차 문이 열리자, 한서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나를 향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린아, 너는 조수석에 앉아. 난 뒤에서 이 여자를 보고 있을게.”
차 안에 꽉 찬 정초아의 날카로운 비명이 귀를 찌를 만큼 요란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초아는 가는 내내 계속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그러다 한서준의 태도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자, 갑자기 몸을 앞으로 확 내밀더니 운전석 쪽으로 달려들었다.
정초아의 손이 거칠게 핸들을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