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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심가은 씨, 서류 아직이에요?” 전화기 너머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거의 다 왔어요.” 백호 그룹 본사까지는 불과 2킬로 남짓 남았지만 앞길 공사로 차들이 줄줄이 멈춰 있었다. 시간을 더 끌 수 없다고 판단한 심가은은 요금을 치르고 차에서 내렸다. 외투로 서류 가방을 감싼 채 폭우를 뚫고 본사 쪽으로 달려갔다. 빗줄기에 얇은 옷은 순식간에 젖어버렸지만 지금은 몰골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중요한 건 단 한 가지, 서류를 제때 전달하는 일이었다. 겨우 현관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는 경비가 막아섰다. 젖은 채로 들어오면 바닥이 엉망이 된다는 이유였다. 하는 수 없이 로비 앞에 멈춰 서서 1층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부탁해 서류를 위로 올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남편 백이현과 그의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내 서류를 전달했다고 알렸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옆에 있던 안내 직원이 그녀의 소박한 차림을 보고는 택배 기사인 줄 알았는지 고생 많다며 따뜻한 물을 내밀었다. 심가은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물을 다 마신 뒤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바로 그때, 중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긴 실루엣이 걸어 나왔다. 백이현이었다. 백호 그룹의 대표이자 법적으로는 아직 남편인 그 사람. 그가 현관 쪽으로 다가오자 심가은은 본능적으로 한발 물러섰다. “대표님, 주서연 씨 차가 길에서 멈췄다고 합니다. 이미 기사 보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백이현은 휴대폰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서연이가 전화를 안 받아. 비서한테 다시 연결해 보라고 해.” 구석에 서 있던 심가은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주서연... 돌아온 거구나.’ 백이현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의가 급하다며 서류를 재촉하던 사람이, 이제는 모든 걸 뒤로하고 첫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었다. 빗물에 흠뻑 젖은 채 현관에 서 있는 자신은 마치 바보 같았다. 백이현은 심가은이 눈앞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가은은 얼굴의 빗물을 훔치며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꼈다. 집으로 돌아와 젖은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물을 한 모금 삼킨 뒤, 그녀는 시어머니 최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최정희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다정했다. “가은아, 무슨 일이니? 목소리가 좋지 않은데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에요.” 심가은은 수화기를 꼭 쥔 채 깊게 숨을 고르더니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저... 백이현하고 이혼하고 싶어요.” 그 순간, 전화기 너머는 고요해졌다. 짧지 않은 정적이 흐르며 심가은의 말이 최정희에게 얼마나 무겁게 다가갔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심가은은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 “저는 처음부터 어머니랑 3년 계약으로 결혼한 거였잖아요. 이제 시간이 다 됐고... 게다가 주서연 씨도 돌아왔잖아요.” 최정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다, 가은아. 네 마음이 어떤지 이제 알겠구나. 내가 변호사한테 이야기해서 이혼 협의서 준비하게 할게. 그리고 예전에 약속했던 보상, 강성 쪽에 있는 별장 한 채... 곧 네 명의로 넘기도록 하마.” 심가은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네.” 3년 전, 심가은은 막 대학을 졸업하고 한 음악 단체와 계약해 꿈을 펼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집안이 갑작스러운 파산으로 무너졌다. 아버지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머니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정신이 무너져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비싼 요양비를 감당할 길이 없어 막막하던 그때, 손을 내민 사람이 바로 최정희였다. 최정희는 교향악단 투자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되자 요양비를 대신 내주겠다며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최정희의 아들, 백호 그룹의 후계자 백이현. 그는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듯 쓰지 못하게 된 채 방에 틀어박혀 있었고 첫사랑인 주서연마저 떠나면서 세상과 등을 지고 있었다. 최정희는 심가은에게 그와 계약 결혼을 하고 곁에서 지탱해 달라고 부탁했다. 돈이 필요했던 심가은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왜 하필 저예요?” “네 얼굴이 서연이와 닮았어. 둘 다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았니. 이현이가 조금이라도 기대어 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시작된 결혼 생활은 사실상 대역이었다. 심가은은 꿈을 내려놓고 백이현과 혼인신고를 마친 뒤, 집에서 먹고 자는 일까지 챙기며 재활 훈련을 도왔다. 마치 가정부처럼, 그의 까칠한 성격과 짜증을 묵묵히 받아내며 곁을 지켰다. 그리고 반년 전, 드디어 백이현은 자유롭게 걸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집 밖으로 나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랜든행 비행기표를 끊어 주서연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 후로도 매달 랜든을 오갔다. 동생 백수민도 랜든에 있었기에 심가은은 백수민의 SNS에서 세 사람의 사진을 자주 보게 됐다. 심가은 앞에서는 웃음기 하나 없는 남자가 사진 속에서는 주서연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볼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송곳처럼 찔렸다. 특히 주서연이 늘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장미. 그 꽃을 볼 때마다 눈이 시렸다. 매년 밸런타인데이마다 백이현이 보낸 것도 샴페인 장미였다. 처음에는 감동했지만 곧 의문이 들었다. ‘왜 굳이 이 꽃일까.’ 그러다 사진 속 주서연의 취향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 꽃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그가 진심으로 전하고 싶었던 사람, 서연을 향한 것이었다. 자신은 그저, 초라한 대역에 불과했다. 이제 주서연이 돌아왔으니 그 대역극도 끝이 났다. 심가은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심가은은 전화를 걸어 오래된 대학 선배 설하영을 찾았다. 설하영은 졸업 후 음악 기관에서 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공동 파트너 자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하영은 줄곧 심가은에게 함께 일하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백이현 곁을 지켜야 했기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혼을 결심한 이상, 다시 세상으로 나가려면 일자리가 필요했다. 심가은의 전화를 받은 하영은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잘 됐다, 가은아! 나 그동안 네가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그때 네가 그렇게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집에만 매여 사는 거 보고 안타까웠거든.” 3년 동안 한 번도 무대에 서지 못했는데도 여전히 자신을 받아주는 선배의 마음이 고마워, 심가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고마워요, 선배님. 곧 제가 밥 한 끼 대접할게요.” “좋아, 기다릴게.” 전화를 끊은 뒤, 심가은은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결혼 증명서를 꺼내 들자 거기 찍힌 자신과 백이현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그 집에 들어간 건 최정희의 소개 덕분이었다. 다리를 다쳐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백이현을 돌봐 달라는 부탁이었다. 처음부터 백이현이 반길 리 없었고 결혼은커녕 심가은이 곁에 있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럼에도 심가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 때마다 막아섰고 수많은 불면의 밤에는 곁에 앉아 향초를 켜주고 음악을 틀어 주며 지켜냈다. 차갑게 내쫓고 거칠게 내뱉는 말에도 심지어 손찌검까지 당해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백이현은 결혼을 받아들였다. 결혼 초, 백이현은 의외로 다정했다. 그때의 심가은은 진심으로 조금 흔들렸다. 이런 모습이라면 설령 평생 휠체어에 앉아 있어도 곁을 지켜줄 수 있겠지. 하지만 곧 알게 됐다. 백수민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그가 결혼을 결심한 건 주서연이 새 남자와 교제한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은 직후였다는 사실. 심가은은 그때 자신이 품었던 감정이 얼마나 우스운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이제 계약 기간도 끝났으니 떠날 때가 됐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속한 남자가 아니었고 애초에 사랑이 아닌 계약으로 시작된 관계였다. 3년의 젊음을 바쳐 얻은 건, 강성 한복판의 별장 한 채, 그 정도면 값어치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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