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그날 밤, 백이현은 끝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심가은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SNS에서 백수민이 올린 라이브 방송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주서연의 귀국을 기념하는 화려한 파티였다.
백이현은 강성에서 가장 큰 호텔을 통째로 빌리고 밤새 불꽃놀이를 쏘아 올렸다.
연회장 곳곳은 샴페인 장미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 주위에 모인 그의 친구들은 모두 즐겁게 축배를 들며 주서연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 세계는 심가은이 단 한 번도 발을 들여본 적 없는 곳이었다. 백이현에게 그녀는 그저 집안일을 챙기는 사람일 뿐, 그의 친구들을 소개받은 적도 공식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은 적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이혼 협의서가 최정희의 손을 거쳐 집에 도착했다. 심가은은 펜을 들어 이름을 적은 뒤, 식탁 위에 고요히 올려두었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장을 보러 나섰다.
계약서에는 분명히 ‘혼인 기간 동안 남편을 돌본다’는 조항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백이현이 집에 돌아오든 말든, 그녀는 여전히 저녁상을 차려놓아야 했다.
밤 여덟 시가 되자 백이현이 돌아왔다.
회사에서 갈아입고 온 듯 단정한 슈트 차림은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었다.
심가은이 음식을 데우려 하자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곧 나가야 해.”
그 말만 남기고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심가은은 뒤따라가 그가 욕실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는 문 앞 선반 위에 새 옷을 올려두었다.
다시 내려와 식탁에 앉은 그녀는 샤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이혼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잠시 후, 백이현은 손목시계를 차며 계단을 내려왔다.
“내일 저녁에 서경시로 출장을 가야 돼. 삼일 일정이니까, 미리 옷 챙겨놔.”
“알았어.”
심가은은 식탁 위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근데 이거... 한번 확인해 봐.”
백이현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짧게 물었다.
“치료비 신청서야?”
그동안 심가은은 생활비나 어머니 요양비가 필요할 때마다 지출 내역을 정리해 계약서처럼 제출해 왔다. 그중 지출이 가장 많은 항목은 늘 어머니의 요양비였다.
이미 습관처럼 되어버린 일이라, 백이현은 단 한 장도 넘겨보지 않고 마지막 장에 서명만 남겼다.
“됐어. 잊지 말고 짐 챙겨.”
그러고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닫히는 문을 바라보던 심가은의 입가에 쓸쓸한 웃음이 번졌다. 사실 심가은 어머니의 상태는 이미 훨씬 나아져, 반년 전부터는 치료비 청구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심가은은 서류를 봉투에 담아 당일 택배로 최정희에게 부쳤다. 최정희의 능력이면 굳이 구청에 가지 않아도 이혼 절차를 진행할 수 있지만 법적으로 정해진 냉정 기간 한 달은 어쩔 수 없었다.
휴대폰을 열자 백수민이 올린 새로운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서경행 항공권 사진이었다.
[오빠랑 형수님이랑 같이 공연 보러 가야지. 이런 기회 놓칠 수 없지!]
알고 보니 출장이라는 것도 거짓이었다. 그는 주서연과 함께, 서경시에서 열리는 아이돌 콘서트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
백이현이 ‘출장’이라며 자리를 비운 동안, 심가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업소를 찾아 여러 매물을 둘러본 끝에 원룸형 작은 집을 하나 계약했다.
최정희가 약속했던 별장은 분명 넓고 좋았지만 그녀가 다닐 음악 기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관리비 또한 만만치 않아 장기적으로는 부담이 될 것이다. 심가은은 차라리 명의 이전이 끝나면 그 별장을 팔아 현금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몸 상태도 많이 회복돼, 예전처럼 요양비가 많이 들지 않는 지금이 오히려 기회였다.
집으로 돌아온 심가은은 본격적으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옷장을 열어보니 걸려 있는 옷들은 모두 결혼 전부터 입던 것뿐이었다.
백이현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새 옷을 사준 적이 없었다.
반대로 심가은이 백이현의 기분을 바꿔보겠다며 사다 준 셔츠와 정장들은 여전히 태그가 붙은 채, 손길조차 닿지 않았다. 그는 늘 두 개 브랜드만 고집했는데 그것도 다 주서연이 추천해 준 것들이라는 걸 백수민을 통해 알게 됐다.
쓸모없이 걸린 옷들을 두고 보니 더 허무했다. 심가은은 결국 전부 박스에 담아 중고 사이트에 저렴하게 내놓았다.
그렇게 사흘을 바쁘게 보내자 집 안에서 자신과 관련된 물건은 모두 새집으로 옮겨졌다.
애초에 가진 것도 많지 않았으니 집이 휑해져도 눈치채는 이는 없었다. 어차피 백이현은 집안에 뭐가 있는지, 어디에 놓여 있는지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으니까.
그가 강성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 심가은은 그의 전화를 받았다.
“내일 종국 아저씨 장례식이 있어. 준비해 둬.”
이씨 가문은 예전부터 백씨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다. 심가은도 예전에 백이현을 따라가 이씨 가문의 연회에 동석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장례식 역시 당연히 함께 가야 했다.
심가은은 이런 자리가 늘 불편했다. 그의 인맥과 세계에서 자신을 곱게 보아주는 사람은 드물었고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은 언제나 숨이 막혔다.
사람들과 두루두루 어울리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더 힘들었지만 심가은에게는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곧 이혼할 텐데... 이런 자리는 이제 마지막이겠지.’
다음 날, 백이현이 집으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그는 비어 있는 옷장이나 달라진 집 안 분위기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여전히 심가은이 챙겨 준 짐만 들고 다닐 뿐이었다.
그리고 휴대폰 메시지에 답을 보내며 무심하게 던진 말이 전부였다.
“저번에 입었던 옷은 별로였어. 이번에는 어머니한테 물어보고 골라.”
“알았어.”
심가은은 짧게 대답했다.
사실 백이현은 평소 그녀가 어떤 옷을 입든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굳이 입는 걸 지적하는 건 체면이 걸린 중요한 자리에 나갈 때뿐이었고 그마저도 아내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 체통이 깎이지 않게 하려는 이유였다.
심가은은 최정희에게 전화를 걸었고 곧 사람을 통해 새 옷 한 벌이 집으로 배달됐다. 입어보니 사이즈가 잘 맞아, 그대로 챙겨 두었다.
다음 날, 심가은은 그 옷을 입고 백이현의 차에 올라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데 괜히 불편해 몸을 조금 움직이던 순간, 손끝에 뭔가 걸렸다.
의자 틈새에서 나온 건 작은 검은색 머리핀이었다. 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주서연이 이 자리에 여러 번 앉았다는 뜻이겠지.’
심가은은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혼 절차가 진행 중이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예전 같았으면 분명 속이 뒤집혔을 테니까.
장례식장 안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주서연과 마주쳤다. 가녀린 몸매에 자신과 비슷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훨씬 더 연약해 보였다.
화장도 거의 하지 않아 순수하고 무해해 보이는 인상이 더 짙게 배어 있었고 마치 ‘청순한 첫사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주서연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백이현을 불렀다.
“이현 오빠...”
당장이라도 그의 팔을 붙잡을 것 같았지만 곁에 심가은이 있다는 걸 의식한 듯 끝내 손을 뻗지 못했다.
백이현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우리 여니.”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심가은을 가리키며 담담히 말했다.
“여긴 심가은이야.”
백이현은 주서연에게는 애칭을 쓰면서 자신에게는 늘 딱딱한 풀네임만 불렀다는 사실을 심가은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미 마음을 비웠다고 생각했는데도 순간적으로 가슴이 쓰라렸다.
더는 둘의 눈빛을 보고 싶지 않아 심가은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머니한테 인사드리고 올게.”
백이현은 심가은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알 수 없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주서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뭐지 방금 그 눈빛은...’
잠시 불안이 스쳤지만 주서연은 곧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과 백이현은 어릴 적부터 함께해 온 인연이자 서로의 첫사랑, 그 어떤 여자도 자신을 대신하진 못하리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