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심가은의 표정 역시 싸늘했다.
그녀는 소매를 걷어 올려 붕대로 감싼 팔을 내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 지금 다쳐서 죽은 못 끓여.”
백이현은 막 터져 나오려던 꾸지람을 간신히 누르고는 입을 닫았다.
“다쳤으면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심가은은 씁쓸하게 웃었다. 얘기하면 뭐가 달라졌을까. 지난 3년 동안 아프거나 다친 날마다 그가 신경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얼마 전 맹장염에 걸렸을 때도 그랬다. 장미숙과 기사까지 집을 비운 날이라 직접 전화를 걸어 병원에 데려다 달라 했지만 그는 랜든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며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만 남겼다.
심가은은 결국 혼자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갔고 수술 뒤에도 간병인은 병원에서 고용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쌓이고 쌓인 실망 끝에 심가은은 더 이상 그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끝날 관계였으니까.
그 순간, 백이현의 휴대전화가 울리며 침묵을 깼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더니 베란다로 걸어 나가 낮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니야.”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따라 들어와 심가은은 몸을 움츠리며 외투를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새벽에 장미숙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손자가 아파 오늘은 올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괜찮아요, 여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심가은은 답장을 보내고 부엌으로 향했다.
심가은은 찬장에서 오트밀을 꺼내 컵에 담고 냉장고에서 달걀 하나를 꺼내 톡 깨뜨려 올렸다. 노른자를 젓가락으로 살짝 터뜨린 뒤 뜨거운 물을 부어 덮개를 씌우고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3분 후, 간단한 아침이 완성됐다.
컵을 꺼내 들고 나온 그녀는 저지방 우유를 부어 섞고 그 위에 견과를 뿌렸다. 이제 막 한 숟갈 뜨려는 순간, 백이현이 계단을 내려왔다.
식탁 위에 놓인 아침이 1인분인 걸 보고는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녀가 팔을 다친 걸 기억해 굳이 뭐라 하지는 않았다. 다만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 이게 아침 전부야?”
심가은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담담히 대꾸했다.
“앞으로 며칠은 알아서 챙겨. 당신 옆에 부지런한 비서 지아 씨가 있잖아. 충분히 입맛에 맞게 해 줄 거야.”
원래라면 주서연이 좋아하는 전복죽 조리법을 묻고 싶었지만 그녀의 냉랭한 태도에 더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이현은 결국 말없이 돌아서며 외투를 집어 들었다.
“이틀은 병원에서 서연이랑 있을 거야. 불편하면 내 지아한테 연락해.”
심가은은 견과를 꼭꼭 씹으며 짧게 답했다.
“응, 알았어.”
2년 전, 백이현이 다시 회사에 복귀했을 때 심가은은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와 메시지를 보냈다. 몸은 괜찮은지, 언제쯤 귀가할 건지, 저녁은 집에서 먹을 건지 사소한 안부라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늘 냉담했고 마침내 심가은의 번호는 차단 목록으로 옮겨졌다.
그 후로 심가은은 백이현에게 전화를 걸 수조차 없었다. 간간이 보낸 메시지에도 답은 드물었고 연락이 닿는 경우라 해도 늘 급한 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그것도 그의 휴대전화가 아니라, 원지아의 전화기를 통해서였다.
그 시각, 병원에 도착한 백이현 앞에 원지아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아침입니다. 광화루에서 전복죽, 운향각에서 닭고기 국수와 간단한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백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들을 주서연의 병실로 들여보내라 했다.
병실 안에서는 주서연이 막 간단히 화장을 정리하고 화장품을 서랍 속에 넣어 두던 참이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운 그녀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가볍게 하품을 한 뒤 나지막이 말했다.
“들어와.”
백이현이 들어서자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 내내 옆에 있어 줬는데 언니 화 안 내셔?”
백이현은 잠시 멈칫했다. 순간 떠오른 건, 아침 식탁에서 유난히 차가웠던 심가은의 표정이었다.
‘그래, 뭔가 달랐어... 원래라면 분명 반응했을 텐데. 왜 오늘은 무심했을까.’
그는 이내 생각을 접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가은이는 원래 성격이 좋아. 괜찮을 거야. 자 아침 먹자.”
주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오빠도 같이 먹어 줄래?”
“그래.”
백이현은 전복죽을 덜어 그녀 앞에 내밀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한 숟갈 떠봤다. 하지만 미묘하게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는 늘 심가은이 차려 준 아침에 길들어 있었기에 고급 요리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남았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걸 본 주서연이 물었다.
“왜 그래? 맛없어? 이 집 죽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먹던 곳이잖아. 여전히 옛날 맛 그대로인데.”
그는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오히려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네가 먹어.”
숟가락을 내려놓은 그는 더는 아침에 손대지 않았다. 병실을 나와 복도 끝 베란다에 서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한 모금 연기를 내뿜자 가슴속 답답함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그때 원지아가 다가와 물었다.
“대표님, 오전 아홉 시 반 회의가 예정돼 있는데 연기할까요?”
“아니.”
백이현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러나 눈앞에 아른거린 건 회의도 병실 안의 주서연도 아닌 심가은의 차분한 얼굴이었다.
백이현은 곧 원지아를 향해 지시했다.
“지아야, 회의는 진 과장이 대신 진행하게 해. 넌 가은이를 데려와서 병원에서 팔 검진 받게 해.”
원지아는 순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원지아는 백이현의 사적인 일까지 늘 챙겼지만 그는 한번도 심가은을 챙기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네,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백이현은 병실로 들어가 주서연에게 잠깐 말을 건네고는 곧장 병원을 떠났다. 원지아는 남은 아침 식기들을 정리하며 자리를 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주서연이 가볍게 손을 들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지아 씨, 머리가 좀 아픈데... 검사 좀 받게 같이 있어 줄래요?”
원지아는 순간 멈칫했다. 백이현이 가장 신경 쓰는 건 심가은이 아니라 주서연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우선 챙겨야 할 사람은 분명 주서연이야.’
짧게 고민하던 원지아는 바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서연 씨. 제가 주치의에게 말씀드려 검사 준비하겠습니다.”
주서연은 흡족한 듯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
한편, 집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던 심가은은 오랜만에 선배 설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참에 식사도 함께하며 앞으로의 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약속 장소는 도심의 한 카페였다. 먼저 도착한 설하영은 그녀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힘껏 안아 주었다.
“가은아, 우리 진짜 너무 오래 못 봤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대학 시절을 떠올리며 한참이나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화가 길어지자 자연스레 아쉬움이 묻어났다.
“생각해 보면 네가 그때 나랑 같이 음악 쪽으로 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넌 전국 대회에서 몇 번이나 우승할 정도였잖아. 그때 우 교수님도 널 대학원 제자로 데려가고 싶다고 했었지.”
심가은은 웃음 속에 짙은 회한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엄마 치료비를 마련해야 했으니 결국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결혼이란 참...’
하지만 이제 곧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이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했다.
설하영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우리 센터 얘기 좀 해줄게. 이름은 ‘루인 아트 센터’야. 원래 운영자는 재벌가 출신인데 실제 관리는 우리 몇 명이 맡고 있거든. 자본도 넉넉하고 인맥도 많아서 주로 상류층 고객들을 상대해. 당연히 선생님들 급여도 업계 최고 수준이고 연말 보너스도 빵빵하지.”
“정말요?”
“응. 네가 우리랑 함께하면 적어도 생활비나 어머님 병원비 걱정은 싹 사라질 거야. 다만 아이들 부모가 워낙 까다롭고 성격이 센 경우가 많아서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힘들 수도 있어.”
심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버티는 건 저 누구보다 자신 있어요.”
지난 3년 동안 백이현의 날카로운 성격과 차가운 말들을 견뎌냈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설하영은 커피를 홀짝이며 다시 물었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