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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심가은은 달력을 세어 보았다. 이혼 접수 뒤 남은 숙려 기간은 아직 스무날 가까이 남아 있었다. “아직 법적으로는 아직 부부예요.” 설하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가은아, 전 남편이 혹시 다시 매달리거나 괴롭히는 건 아니지?” 심가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요. 오히려 저랑 하루라도 빨리 갈라서고 싶어 할걸요.” 백이현의 마음은 이미 온전히 주서연에게 가 있었다. “그럼 다행이고.” 설하영은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네며 신중하게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받아 둬. 내 친구인데 강성에서 제일 유명한 로펌에 다녀. 이혼 소송 전문이라 웬만한 일은 다 해결해 줄 수 있어. 혹시 곤란해지면 연락해. 불리하지 않게 도와줄 거야.” 심가은은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설하영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언니 고마워요.” ... 집에 돌아오니 이미 저녁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현관 앞에는 낯선 하이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거실 소파에는 여성의 옷가지와 가방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곧 2층에서 들려오는 주서연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이제 막 퇴원해서 들어왔다고 했었지...’ 심가은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목소리는 다름 아닌 안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해도 안방은 아직 분명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주서연이 아무렇지 않게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가은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이 턱 막혔다. 타월 하나만 걸친 주서연이 침대에 앉아 있었고 백이현은 바로 옆에서 그녀의 발목에 약을 정성스레 바르고 있었다. 심가은은 당장이라도 쏟아낼 욕설을 억지로 삼켰다. 주서연은 그녀를 보자 황급히 변명했다. “언니 방금 욕실에서 미끄러져 발목을 다쳤어요. 그래서 이현 오빠가 약 좀 발라 준 거예요.” 심가은은 차갑게 물었다. “그런데 왜 제 방에 있는 거예요?” 주서연은 그 말투에 움찔하며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억울하고 연약한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방 샤워기가 고장 나서요... 잠깐 오빠 방 욕실을 빌린 거예요. 언니가 불편하다면 당장 나갈게요.” 그러고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지만 발목 통증 탓에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백이현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두 사람의 몸이 그대로 맞닿자 주서연은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백이현은 부드럽게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가은이가 이해할 거야.” 그러더니 시선을 돌려 심가은을 똑바로 보며 얼굴을 굳혔다. “방금 너무 심했어. 서연이한테 사과해.” 심가은은 허탈한 웃음만 새어 나왔다. 타월 하나 걸친 여자가 안방 침대 위에 앉아 있고 남편이라는 사람은 그 옆에서 다정히 약을 발라 주며 몸까지 끌어안고 있는데 잘못한 건 자신이라는 말인가. 그뿐 아니라 사과까지 하라니. 심가은은 차갑게 눈길을 거둔 채, 더 이상 말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계단을 돌아 내려갔다. “심가은!” 백이현은 그녀가 돌아서는 태도에 불만을 감추지 못하고 날카롭게 불렀다. 심가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더욱 차갑게 말했다. “내가 사과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백이현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고 목소리에는 짙은 불쾌감이 묻어났다. “이건 명령이야. 네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고.” 3년 내내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과거의 심가은은 참고 또 참았지만 이제 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다. 심가은은 턱을 치켜들며 비웃듯 말했다. “그래, 사과할게. 미안하다. 내가 당신들이 한참 즐기는 자리를 방해했네. 원래 제대로 된 아내라면 남편이 애인이랑 엉겨 붙어도 못 본 척 넘어가 줘야 하는데 말이지.” “심가은!” 백이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분노를 드러냈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심가은의 시선은 곧장 그의 팔로 향했다. “내가 틀린 말 했어? 지금 그 팔, 어디에 두고 있는데?” 그제야 백이현은 자신이 아직도 주서연의 허리를 감싸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서연은 마치 큰 모욕이라도 받은 듯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제발 이현 오빠랑 다투지도 마시고요. 제가 오늘 밤 바로 나가면 되잖아요.” 서주연은 그러고는 절뚝이며 방을 뛰쳐나갔지만 곧 계단에서 크게 비명을 질렀다. 놀란 심가은이 뒤를 돌아보니 주서연이 그대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이었다. 백이현은 반사적으로 심가은을 거칠게 밀쳐내고는 달려갔다. 충격에 심가은은 바닥에 세게 넘어졌고 화상 자국이 있던 팔꿈치가 다시 욱신거리며 통증을 쏟아냈다. “여니야! 괜찮아?” 백이현의 다급한 목소리가 계단 아래서 울려 퍼졌다. 이어 현관문이 급히 열리고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심가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 또 병원에서 밤새워 간호하겠지.’ 심가은은 이불 시트를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주서연이 쓴 흔적이라면 두 번 다시 닿기도 싫었다. 간단히 정리를 마치고 휴대폰을 확인하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가은아, 서연 방에서 옷 두 벌 챙겨 병원으로 가져와.] 심가은은 피식 웃으며 답도 하지 않은 채 휴대폰 전원을 꺼 버렸다. 심가은은 씻은 뒤 새 시트를 깐 침대에 몸을 눕혔다. 더 이상 두 사람의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눈을 감은 그녀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원지아가 집에 찾아왔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주서연 씨 옷을 두 벌 챙겨 달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심가은은 별다른 표정도 없이 2층 방을 가리켰다. “저기가 서연이 방이에요.” 원지아는 서둘러 옷을 챙겨 나왔지만 발걸음을 떼기 전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사모님도 함께 병원에 와서 서연 씨를 돌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원지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 건, 그녀 자신도 그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가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치즈 오믈렛 토스트를 조용히 베어 물었다. 원지아는 무시당한 듯 서운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가은은 백이현을 위해 뭐든 기꺼이 했는데 지금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원지아 역시 속으로는 백이현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아내에게 애인을 직접 돌보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원지아는 더 말하지 않고 황급히 인사만 남긴 채 집을 나섰다. 아침을 마친 심가은은 새집으로 보낼 생활용품들을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결제를 막 끝낸 순간, 휴대폰 화면에 영상 통화가 떴다. “심가은 너 너무하는 거 아니야? 서연이가 다친 게 누구 때문인데? 당연히 병원에 와서 사과하고 돌봐야지!” 날 선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가은은 피식 웃으며 차갑게 받아쳤다. “그건 자기가 넘어진 거야. 나랑 무슨 상관이지? 그리고 내가 안 가면 어쩔 건데?” 심가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단호했다. 백이현은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늘 착하고 순하기만 하던 심가은이 이렇게 맞선 건 처음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목소리를 눌렀다. “심가은 잊지 마. 누가 널 먹여 살리는지. 내가 시키면 넌 하는 거야.” 그 말에 심가은의 가슴속에서 오래 눌러왔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난 3년 동안 그를 위해 모든 걸 쏟아부으며 다시 일어서게 해 준 것도 자신인데 돌아온 건 모욕뿐이었다. 더는 대꾸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심가은은 통화를 끊고 백이현의 연락처를 바로 차단했다. 예전, 백이현이 자신의 번호를 차단했을 때는 가슴이 막혀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차단 버튼을 누르는 순간 오랜 응어리가 풀려나가며 속이 시원해졌다. 잠시 후, 원지아의 번호가 또 떴다. 하지만 심가은은 망설임 없이 그 번호까지 차단하고 전원을 꺼 버렸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 속에서 집안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심가은은 다가올 출근을 떠올리며 근사한 옷과 구두를 새로 마련하기로 했다. 다행히 생활비를 아껴 모은 여유 자금이 있었기에 직접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이현은 매달 생활비 6백만과 개인 용돈 백만 원을 지급했지만 중요한 자리에 함께 나갈 때는 반드시 별도 신청을 해야 했다. 옷장 안에 걸린 명품 가방과 보석들 역시 모두 ‘사용 권한’만 있었을 뿐, 명의는 전부 백이현의 것이었다. 그래도 생활비를 아껴 쓰며 남은 돈을 모아온 덕분에 3년 동안 모인 금액이 어느새 1억이 넘었다. 하지만 그 모든 합을 더해도 백이현이 주서연에게 선물한 명품 가방 하나 값에도 못 미쳤다. 수치심은 늘 심가은의 몫이었고 백이현은 단 한 번도 그 마음을 이해해 준 적이 없었다. 심가은은 또다시 백이현이 자신을 사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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