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심가은은 백화점에서 단정한 옷 네 벌과 편한 구두 두 켤레를 골랐다. 계산서를 받아 들고 나오니 6백만 원이 훌쩍 넘었지만 오랜만에 자신을 위해 돈을 쓴 탓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비싼 옷을 사본 적이 없었다. 백이현과 연회에 나갈 때 입은 드레스들은 화려했지만 단 하나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평소 입는 옷은 늘 소박했고 그래서인지 백이현은 가끔 촌스럽다며 비웃고는 했다. 정작 그녀를 위해 지갑을 열지 않으면서 주서연에게는 해외 명품 브랜드와 계약해 매년 옷을 보내줬다는 사실을 심가은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대놓고 차별받으면서도 혹시나 사랑받는다고 믿었던 자신이 더 우스웠다.
백화점을 나서는 순간, 마침 백수민과 마주쳤다. 선글라스를 벗은 백수민은 그녀 손에 들린 쇼핑백을 보고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언니 서연 언니가 언니 때문에 다쳐서 병원에 누워 있는데 병문안은 안 가고 쇼핑이요? 오빠 돈으로 살면서 이제는 너무 당당하신 거 아니에요?”
심가은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서연이가 왜 다쳤는지는 네 오빠가 제일 잘 알 거야. 내가 가서 내 남편 애인 병시중까지 해 줘야 해? 그리고 이건 내 돈으로 산 거거든.”
“언니 돈이요?”
백수민은 콧방귀를 뀌었다.
“언니 일도 안 하시잖아요. 어디서 돈이 나는데요?”
심가은은 태연하게 받아쳤다.
“장 집사가 한 달에 5백60만 받지? 난 네 오빠 아내로 밥 차리고 재활 도와주고 살림까지 했어. 생활비 받는 게 당연한 거지, 그걸로 생색내는 게 더 웃기지 않아?”
백수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예전 같으면 고개 숙이고 아무 말 못 했을 심가은이 이렇게 똑 부러지게 반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언니 그러다 오빠가 언니 버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언니가 오빠 얼마나 좋아했는지 다 아는데. 오빠가 밀어내도 매달리던 사람이 언니였잖아요. 그러니까 당장 사과하세요. 안 그러면 제가 오빠한테 다 말할 거예요. 요즘도 서연 언니 때문에 오빠가 언니한테 불만인데 내가 한마디만 얹으면 바로 돌아서실걸요.”
심가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 잘됐네. 나도 이혼 준비 중이야. 몰랐어?”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자신도 귀하게 자라난 딸이었을 텐데 지난 세월 이런 수모를 견뎌야 했다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어차피 끝낼 결혼, 두려울 게 없었다.
“이혼?”
백수민은 눈이 동그래졌다. 백이현을 그렇게 사랑하던 심가은이 이혼을 말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백수민은 곧 비웃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언니 설마 이혼으로 오빠 협박해서 서연 언니랑 갈라놓으려는 거 아니죠? 헛수고예요. 오빠는 서연 언니 진심으로 사랑해요. 언니 말에 흔들릴 분 아니에요. 괜히 판 키우지 마세요. 이혼하고 나서 오빠보다 나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심가은은 단호한 표정으로 잘라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난 절대 돌아보지 않아. 주서연이 원한다면 백이현은 그냥 줘버릴 거야.”
그녀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당당히 걸어 나갔다.
백수민은 그 뒷모습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좋아요, 언니. 오빠한테 바로 말씀드려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두고 보죠.”
...
백호 사립 병원.
백이현은 병실 문 앞에 서서 휴대폰을 내려다보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심가은이 내 번호를 차단했다고? 감히 어떻게...’
백이현은 요즘 들어 심가은의 태도가 갈수록 눈에 거슬렸다.
그때 복도 끝에서 백수민이 다가오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빠, 언니 좀 어떻게 해. 진짜 갈수록 뻔뻔해져. 오늘 백화점에서 봤는데 옷을 한가득 사 들고 있더라니까. 나한테는 말도 막 하고. 오빠가 밖에서 얼마나 힘들게 버는 돈인데 언니가 그렇게 막 써도 돼?”
“가은이가... 옷을 샀다고?”
백이현은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의 기억 속 심가은은 늘 검소했다. 몇 벌 안 되는 옷만 돌려 입고 촌스럽다며 핀잔까지 듣던 여자였다. 그런 사람이 새 옷을 샀다고?
백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급히 다그쳤다.
“맞아. 분명 오빠 카드 쓴 거야. 빨리 정지시켜.”
하지만 백이현은 멍하니 서 있었다. 생활비 말고는 카드를 준 적이 없었다.
“설마 가족카드 준 거 아니야? 아니면 언니가 무슨 돈으로 옷을 사겠어.”
백이현은 예전에 백수민에게만 한 달에 2억 한도로 쓸 수 있는 가족카드를 쥐여 준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이 떠오르자 이상하게도 심가은에게 미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니야. 가족카드는 안 줬어.”
“그럼 뭐야? 오빠가 직접 돈 꽂아준 거야? 한 달에 얼마씩? 그냥 계좌 막아 버리면 되잖아.”
백이현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삼백만 정도.”
“뭐? 삼백만?”
백수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오빠 진짜 짜다. 그 돈이면 나 신발 하나 사면 끝인데.”
그러다 잠시 전 심가은이 들고 있던 쇼핑백이 떠올랐다. 명품이 아니라 평범한 브랜드 로고였음을 떠올리자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백수민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언니 엄마 병원비는 오빠가 다 내주고 있잖아. 그것만 해도 엄청난데.”
그 말에 백이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심가은 어머니의 치료비는 매달 수천만 원이었고 그동안 자신이 부담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곧 원지아를 불러 단호하게 지시했다.
“가은이 엄마 병원비, 당장 끊어. 이번 일로 무릎 꿇고 빌게 만들어.”
잠시 후 전화를 마친 원지아가 돌아와 조심스레 보고했다.
“대표님, 확인해 보니 사모님 어머님은 반년 전부터 일반 병동에 옮겨졌고 사모님께서 직접 비용을 내고 계십니다. 회사나 대표님 계좌에서는 한 푼도 나간 적이 없습니다.”
백이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며칠 전 자신이 사인했던 결재 서류가 떠올랐다. 그게 심가은 어머니 병원비가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짜증이 치밀었고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그때 백수민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럼 언니 말이 진짜였던 거야? 정말 이혼하려는 건가?”
“이혼?”
백이현의 표정이 단숨에 얼어붙었다.
백수민은 잽싸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응, 언니가 직접 말했어. 그때 눈빛이 장난 아니더라니까. 오빠, 설마 진짜 이혼하는 거 아니야?”
그러더니 오히려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
“잘됐잖아! 그렇게 버텨도 안 나가더니 이제야 알아서 물러나는 거네. 오빠, 이제 이혼하고 서연 언니랑 결혼해.”
“누가 이혼한다고 했어!”
백이현은 갑자기 고함쳤고 뜻밖의 반응에 백수민은 멍해졌다.
“아니... 오빠는 서연 언니만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백이현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심가은이 이혼을 입에 올렸다는 사실이, 가슴속 어딘가를 거칠게 긁고 지나갔으며 불편하고 못마땅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엉켰다.
“난 단 한 번도 이혼을 생각한 적 없어.”
백이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러자 백수민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럼 서연 언니는?”
백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주서연이 아직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곁을 지켜준 사람은 심가은이었고 자신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녀 덕분이었다.
심가은에게 줄 수 있는 게 결혼뿐이라 해도 그마저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주서연을 놓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로는 주서연을 더 보살피고 채워주면 된다고 스스로 합리화했고 백이현은 결국 지금의 상황을 바꿀 마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