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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심가은은 백화점에서 산 물건들을 새집에 옮겨 놓고 정리를 끝낸 뒤에야 다시 백씨 저택으로 돌아왔다. 거실 불을 켜자 백이현이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심가은은 말없이 신발만 갈아 신고 그대로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백이현이 불쑥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힘껏 소파로 내던졌다. 심가은은 화상 자국이 남아 있던 팔꿈치를 부딪쳤고 찌릿한 통증에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백이현은 그런 사정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듯, 언제나처럼 차갑게 몰아붙였다. “오늘 뭐 하는 거야? 감히 나를 차단해? 그리고 병원 가라고 했는데 왜 안 갔어?” 지난 3년 동안 그가 기분이 나쁘면 가장 먼저 화풀이 대상이 된 건 늘 심가은이었다. 말로만 퍼붓는 날도 있었지만 참지 못하고 손찌검을 한 적도 많았다. 가장 심할 땐 가구 모서리에 부딪혀 등에 시퍼런 멍이 들어 사흘이나 누워 있어야 했다. 사과를 하긴 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고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고. 심가은은 그가 환자라는 이유로 이해하고 감쌌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는 이미 일어섰고 더 이상 예전처럼 절망에 잠긴 환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런 대우를 참고 견딜 이유도 없었다. 심가은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 번호 차단하면서 난 당신 위챗 차단도 못 해? 그리고 난 주서연 보모 아니야. 그 사람이 다친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가서 돌봐야 해?” 백이현은 순간 멍해졌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휴대폰을 열어 블랙리스트를 확인하니 정말 심가은의 번호가 차단돼 있었다. 언제, 왜 그렇게 했는지는 이미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짜증 섞인 손길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더니 피곤한 얼굴로 심가은을 바라봤다. 늘 순순히 말을 듣던 아내가 요즘은 너무 거칠어졌다. 문득 며칠째 그녀가 해 주는 밥을 못 먹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 맛이 괜스레 그리워졌다. 백이현은 곧 자신이 최근 그녀를 소홀히 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돌렸다. “좋아, 네가 날 차단한 거랑 내가 예전에 네 번호 차단했던 거랑 퉁치자. 서연 쪽은 네가 병원에 직접 갈 필요 없어. 대신 밥은 네가 해서 하루 세 끼 챙겨 보내.” 그러면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그녀 앞에 내밀었다. “기분 풀 겸 옷 좀 사 입는 건 괜찮아. 하지만 수민이랑 괜히 다투고 남들 앞에서 험한 소리 하는 건 삼가. 우습잖아. 난 단 한 번도 이혼할 생각 없어. 그러니까 너도 그 얘기 다시 꺼내지 마. 이 카드는 네게 줄게. 한 달에 4천만 한도로 쓸 수 있어. 보조금처럼 생각해. 네 어머니 지금은 큰 치료비가 안 들더라도 앞으로는 영양제나 관리비가 필요하잖아. 이 카드 쓰면 더 이상 나한테 따로 신청할 필요 없을 거야.” 백이현은 심가은이 돈에 늘 쪼들린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 조금만 더 쥐여 주면 예전처럼 얌전히 따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심가은은 그의 손에 들린 가족카드를 보자 허무한 웃음이 터졌다. 지난 3년 동안 생활비를 달라고 말할 때마다 그는 늘 위에서 내려다보듯 굴며 일부러 내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 와서 스스로 카드를 내민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제는 필요 없어.’ 3년짜리 계약 같은 결혼도 끝이 다가오고 어머니의 병세도 많이 호전됐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돈도 그의 시혜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 원하는 건 단 하나, 이 지긋지긋한 사람과 결혼을 끝내는 것뿐이었다. 심가은은 카드를 밀어내며 냉소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안 받아. 필요 없어.” 그러자 백이현의 이마가 즉시 구겨졌다. “4천만으로는 부족해? 얼마나 더 원해?” 그는 이미 충분히 잘해 주고 있다고 믿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생활비를 챙겨주고 장모님의 치료비까지 감당하는 자신을 고마워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심가은은 도무지 만족을 모른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가은은 차갑게 잘라 말했다. “당신한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이혼뿐이야. 어차피 합의서에 이미 도장 찍었잖아. 그냥 깨끗하게 끝내.” “이혼 합의서?” 백이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내가 언제 그런 데 도장 찍었어?” 심가은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벌써 잊었어? 지난번...”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백이현이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백수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큰일 났어! 서연 언니가 갑자기 쓰러졌어!” 백이현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뭐라고? 잠깐 기다려, 금방 갈게.” 그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집을 나섰다. 심가은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그가 가장 아끼는 건 언제나 주서연이었다. ‘내가 떠나면 오히려 더 홀가분하게 주서연과 함께할 수 있겠지.’ 그리고 심가은 역시 마침내 이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 백이현은 꼬박 일주일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가은은 이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해하며 마음을 쓰는 일 따윈 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켜 두리번거리다 우연히 백수민이 올린 SNS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은 항공권 한 장이었고 그 밑에는 글귀가 달려 있었다. [행복하다. 오빠랑 언니 덕분에 아스이란드까지 따라가 오로라도 보게 됐다.] 순간 모든 게 이해됐다. 백이현이 주서연과 여행을 떠났으니 굳이 자신에게 주서연의 식사까지 챙기라고 닦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가은은 질투심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저 정도 다쳐놓고도 저렇게 여행을 갈 수 있다니 주서연이 다친 게 참 가벼웠구나 싶었을 뿐이었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가은아, 다음 주가 내 생일인데 꼭 와줄 거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정희였다. 심가은은 잠시 침묵하다가 담담히 대답했다. “네, 어머니. 갈게요.” 최정희는 바로 웃음을 터뜨렸지만 곧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말이다, 가은아. 나는 네가 참 마음에 들어. 안타깝게도 이현이가 널 몰라보고 소중히 하지 않는 게 문제지.” 최정희 눈에 심가은은 비록 출신은 평범했지만 묵묵히 참아내며 아들을 지탱할 줄 아는 며느리였다. 주서연처럼 자기 멋대로 구는 성격이 아니어서 오히려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이 기어코 주서연을 놓지 않으니 결국 심가은을 지켜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백이현과 주서연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마침 최정희의 생일 파티가 열렸다. 백이현은 집에 오지 않았기에 심가은은 곧장 저택으로 발길을 옮겼다.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말끔한 정장을 입은 백이현과 샴페인 빛 드레스를 입은 주서연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팔짱을 낀 채 서 있었고 하객들은 하나같이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서연은 환한 미소로 그 말들을 고스란히 즐겼고 심가은은 조용히 구석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러다 백이현이 그녀를 발견하고 얼굴을 굳힌 채 다가왔다. “여기 웬일이야?” 차갑게 날아든 목소리에 심가은은 담담히 받아쳤다. “어머니가 부르셨어.” 백이현은 곧바로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잠깐 와서 생일 축하만 드리고 바로 가. 괜히 사람들 눈에 띄게 하지 마.” 일방적인 말만 남기고 그는 곧장 발길을 돌렸다. 잠시 후 누군가 심가은을 향해 물었다. “저분은 누구신가요?” 백이현은 힐끗 쳐다보고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냥 내 비서야.” 심가은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에게 자신은 어디까지나 ‘집 안에서 밥하고 살림하는 여자’일 뿐, 겉으로 내세울 수 없는 존재였다. 가까운 지인 모임에서는 겨우 아내로 불렸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는 언제나 그림자 취급이었다. 그때 무대에 오른 주서연이 피아노 앞에 앉았고 고운 선율이 홀 안을 가득 채우자 감탄이 터져 나왔다. 연주를 마친 주서연은 백이현 곁으로 내려와 그의 팔에 자연스레 기대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감탄하듯 외쳤다. “서연 씨, 랜든 로열 아카데미 출신 맞죠? 정말 재능이 대단하시네요.” 주서연은 수줍게 웃으며 백이현 쪽으로 몸을 기댔다. 찬사가 이어질수록 백이현의 표정에도 뿌듯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의 눈에는, 집안 배경 좋고 예쁘며 학력과 재능까지 갖춘 주서연이야말로 완벽한 짝이었다. 반면 심가은은 그저 집 안에서 밥하고 뒷바라지하는 데 어울릴 뿐, 바깥세상에 내보이기에는 부끄러운 여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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