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배신
호텔 파티룸.
화려한 샴페인 타워 앞, 고은찬과 그의 새로운 비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꼭 맞잡은 채 생일 케이크를 잘랐다.
심재이가 들어온 것을 보고도 고은찬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했다.
“유나도 오늘이 생일이더라고. 유나는 부모님도 지방에 있고 친구도 없어서 오늘은 유나 생일 먼저 축하해줬으면 하는데 괜찮지? 네 생일은 다음 날 다시 챙겨줄게.”
심재이의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가방을 잡고 있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녀의 25살 생일로 고은찬은 이날 그녀에게 프러포즈하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래서 그가 선물해 준 흰색 원피스를 입고 예쁘게 메이크업까지 받은 채 호텔에 왔건만, 돌아온 건 다음 날 챙겨주겠다는 말뿐이었다.
심재이는 상처받은 마음을 꾹 누른 채 고은찬의 앞으로 다가가 소유나의 손을 가리켰다.
“그럼 저 반지는 뭐야?”
고은찬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생일이라는 걸 알게 된 지 몇 시간 안 되기도 했고 또 마침 유나도 좋아하길래 그냥 줬어.”
소유나가 하고 있는 반지는 심재이가 3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 반지였다.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다 들리는 듯했다.
심재이는 눈가가 빨개진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추궁했다.
“고은찬, 너는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고은찬이 지친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심재이, 네가 애야? 고작 생일 한번 안 챙겨줬다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챙겨줬잖아. 이번만 양보 좀 하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하, 이번만 양보하라고?”
고은찬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모순적인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을까?
그는 소유나의 직급을 올려주기 위해 심재이가 거의 따낸 계약을 홀라당 채가 버렸고 소유나가 실수인 척 심재이에게 커피를 쏟은 것도 그 정도의 실수도 이해해주지 못하냐면서 오히려 그녀를 구박했다.
또한 소유나가 업무적으로 잘못한 것 역시 모두 심재이가 처리하게 하며 모든 공로는 전부 소유나에게 돌렸다.
‘그런데 이번만이라니, 대체 얼마나 더 양보해야 만족하는 거지? 사실은 소유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누가 와도 나에게 하는 것보다는 잘해주지 않을까?’
심재이는 눈물을 꾹 참은 채 화장실로 들어갔다. 눈물 흘리는 모습 따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들어간 후, 자리에 앉아있던 친구들이 눈치를 보며 고은찬에게 말했다.
“너 이번에는 좀 심했어.”
“재이가 프러포즈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오늘 같은 날 네 비서를 데리고 와서 재이 심기를 건드려?”
고은찬은 태연한 얼굴로 케이크를 자르며 소유나에게 한 조각 건네주었다.
소유나는 아무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가 이내 불안한 얼굴로 고은찬의 팔을 잡았다.
“대표님, 심 팀장님 화난 거 아니에요? 저 때문인 것 같은데 어떡해요...”
고은찬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정하게 위로를 건넸다.
“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괜히 풀 죽지 마. 언젠가는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도 되는 듯한 저 버릇 좀 고쳐주려고 했어.”
“은찬아, 너 정말 괜찮겠어? 이러다 제수씨가 네 프러포즈를 거절하면 어쩌려고?”
고은찬은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갑자기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크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나랑 결혼하는 게 평생의 소원이던 애야. 내 와이프 자리 차지하지 못해서 안달인 애라고. 그런데 내 프러포즈를 거절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리고 뭔가 착각하나 본데 우리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나야. 쟤가 하도 좋다고 다 맞춰주니까 내가 불쌍해서 같이 있어 주는 거라고. 알아들었냐?”
고은찬의 말이 끝나자마자 친구들이 멋있다며 박수를 보냈다.
“역시 은찬이야. 하긴 남자친구가 은찬인데 납작 엎드려야지.”
“어떻게 하면 너처럼 살 수 있는지 좀 가르쳐줘봐.”
“넌 안 돼. 너한테는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여자가 없잖아.”
고은찬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재이와 고은찬은 소꿉친구로 늘 함께했다. 아니,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면 심재이가 어떻게 해서든지 꼭 옆에 붙고야 말았다.
그 노력은 비단 대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뿐만이 아니라 졸업하고 나서도 여전했다.
심재이는 막 창업한 고은찬을 위해 자신이 제일 사랑하던 피아노도 포기하고 기꺼이 그를 위해 비서 일을 자처했다. 프로젝트 하나 때문에 한 달 내내 야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접대 때문에 피를 토할 때까지 술을 마셔도 늘 괜찮다고만 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자아가 없는 인형, 또는 오직 고은찬밖에 보이지 않는 바보라고 불렀다.
그리고 고은찬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심재이는 떠나가지 않을 거라 확신하며 점점 선을 넘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심재이는 귀를 틀어막은 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안색에 빨개진 눈, 그리고 차라리 우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의 미소, 그녀는 지금 그 누구보다 엉망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재이, 자그마치 10년이야. 이제 그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