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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전신을 덮친 욱신거림이 어젯밤의 혼란을 떠올리게 했다. 무력감과 짜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분명히 싫다고 말했는데도 육현재는 끝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별장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늘 들리던 이윤이의 웃음소리와 발소리가 전혀 없었다. 낯선 정적에 임지현의 심장이 순간 내려앉았다. 그녀는 곧장 몸을 일으켜 대충 옷을 걸치고 계단을 내려왔다. 평소와 다른 주방 풍경에 그녀는 굳어버렸다. 식탁 앞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 테이블 위는 지나치게 말끔했다. “아주머니, 이윤이는요?” 임지현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다급함이 실렸다. “사모님, 이윤이는 아침 일찍 어린이집에 갔어요.” “어린이집이요?” 임지현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이윤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역시나 육현재는 또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이윤이를 빼돌렸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아이를 아무 예고 없이 여름 캠프에 보내 버렸던 그때와 똑같았으니까. 임지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윤이가 또다시 자신의 시야 밖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일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육현재 씨한테 연락해요.” 임지현이 단호하게 말하자, 오순자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각 안성 그룹 본사 대회의실에서는 중요 안건을 두고 회의가 한창이었다. 정적이 감도는 공간에서 육현재의 휴대전화가 갑작스럽게 진동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육현재! 이윤이 어디 데려간 거야?” 임지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회의실을 가르듯 울려 퍼졌다. “어린이집에 보냈을 뿐이야. 세 살이면 이제 어린이집 다녀야 해.” 육현재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마치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말하듯. “어디 어린이집인데?” “걱정하지 마. 내가 고른 곳이야. 당연히 최고의 시설이지.” 학교 이름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너 계속 이런 식으로 나를 가둬 둘 수는 없어! 나도 나가서 직장에 다니고 싶고 내 생활이 필요해!” “자기는 내가 책임질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소유 선언이었다. 회의실에 앉아 있던 임원들 사이로 말 없는 파장이 일었다. 냉정하고 사생활이 철저하기로 유명한 육현재가 유부남인 데다가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처음 알게 된 이들도 있었다. “난 필요 없어! 나도 사람이야. 정상적인 생활이 필요해. 네가 키우는 새장 속 새가 아니라고!” 임지현의 분노가 고스란히 스피커를 타고 회의실에 울렸다. 육현재는 휴대전화를 살짝 귀에서 떼어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뜻밖에도 싱긋 웃었다. “자기야, 나 지금 회의 중이야.” 잠시 호흡을 고른 뒤,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할 말 있으면 집에 가서 하자. 사랑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미련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저분이 정말 우리 대표님이었나?’ 스피커 너머로 들려온 건 분명 여성의 목소리였다. 사내에 오래도록 떠돌던 대표의 성향에 관한 온갖 추측은 그 순간 단숨에 힘을 잃었다. 갑작스러운 통화를 끝으로 회의실 안은 묘한 침묵에 잠겼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속으로만 의문을 삼킬 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사적인 일로 잠시 회의를 중단시켜서 미안합니다.” 육현재는 여전히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었다. “계속하죠.” 조금 전까지 보고를 이어가던 이재민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치밀하게 준비해 온 문장들이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그... 아까 그 부분은...” 횡설수설하며 흐름을 되찾으려 애쓰던 그때, 육현재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만합시다. 아직 정리가 안 된 것 같으니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합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이 잿빛으로 굳은 이재민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정리되면 내 사무실로 와요.” 그는 몸을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준비해 온 말로 나를 속이려 들지 마요. 솔직함만이 당신을 살릴 수 있을 테니까.” 어깨 위에 얹어진 그의 손에 힘이 실리자, 이재민은 몸이 굳은 채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스스로 완벽히 숨겼다고 믿고 있었다. ‘대표님은 도대체 언제 알아챈 거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재민은 혼자 회의실에 남아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재민은 비틀거리듯 사무실로 돌아갔다. 머릿속에는 오직 컴퓨터 속 증거를 당장 없애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문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그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책상 위가 텅 비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자료가 담긴 노트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닦아낸 듯 희미하게 남은 자국뿐이었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가장 가까운 비상계단으로 내달렸다. ‘쾅’ 하고 무겁게 방화문을 밀어젖히는 순간 시야에 무표정한 유동욱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뒤에 늘어선 네 명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은 길을 완전히 막아선 채 압박했다. “이재민 님, 대표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유동욱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말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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