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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할 일을 끝낸 한유설은 서빙 카트를 끌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부엌 근처로 가 카트를 원위치시키려는데 정수연이 다가와 그녀에게 열쇠 꾸러미를 건넸다. “내일 아틀리에 청소 담당은 유설 씨인 거 기억하죠?” 한유설은 기억을 훑어보다 확실히 그런 일정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열쇠를 건네받았다. “네.” 정수연이 자리를 벗어날 때 미세하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한유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아침. 알람도 없이 일어난 한유설은 준비를 마친 후 아침 일찍 직원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너무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아침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셰프는 그녀를 향해 조금 이따 다시 오라고 했다. 그 말에 한유설은 발걸음을 돌리며 기왕 이렇게 된 거 아틀리에 청소를 먼저 마친 후 다시 먹는 게 좋겠다며 현관문을 나섰다. 아틀리에는 별장 본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곳은 네 명의 남주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으로 햇빛까지 화사하게 비치고 있어 성역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기도 했다. 사실 아틀리에 청소는 상주 도우미들이 아닌 청소 전문 도우미들의 일이었지만 한달에 두세 번밖에 없는 청소인데도 매번 그림을 떨어트린다든가 하는 일을 벌이는 바람에 집사가 상주 도우미들이 청소하는 것으로 당번을 바꿔버렸다. 면적이 지나치게 큰 건 아니었기에 상주 도우미들도 충분히 시간을 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틀리에 앞에 도착한 한유설은 천천히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지나치게 더럽거나 어지럽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림들도 거의 다 천막으로 덮어져 있었다. 한유설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공간에 입을 떡하고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 키보다 더 큰 식물들도 군데군데 심어져 있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힘든 건 자기 자신이었기에 얼른 청소 도구를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깨끗하게 청소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청소에 집중하던 한유설은 문득 고개를 돌리다 베란다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볼까도 했지만 올라가는 것이 귀찮아 베란다는 마지막에 청소하기로 했다. 바닥 청소를 마친 한유설은 깨끗한 물을 받아와 이번에는 액자들을 조심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닦으며 그림을 보니 확실히 유니크하고 색감이 예쁜 것이 새삼 네 명은 아티스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액자까지 다 닦은 후 그녀는 물통을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 햇빛이 화사하게 내리비치는 테라스의 풍경을 감상할 틈도 없이 한유설은 사람 실루엣에 깜짝 놀라버렸다. “깜짝이야! 심, 심해원 씨세요?” 심해원은 햇빛은 잔뜩 받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한유설은 여느 때처럼 무척이나 예뻤고 두 볼도 빨갛게 물들어있어 상당히 매혹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지금은 눈도 커다랗게 뜨고 입까지 벌리고 있는 것이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심해원은 아주 잠깐 그녀를 모델로 그려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피곤한 거머리를 스스로 자기 몸에 붙이는 격이 될까 봐 다시 생각을 접었다. “네.”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한유설은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금방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자기 할 일을 했다. 그리고 심해원 역시 다시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그림 그리는 것에 집중했다. 잠시 후. 베란다 청소까지 마친 한유설은 심해원의 뒤를 지나가다 우연히 그의 그림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 그래서 아침 일찍...’ 심해원이 그리고 있던 건 일출이었다. 언젠가 뉴스 같은 데서 봤던 작품들과 견주할 수 있을 만큼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그런 그림이었다. 일을 마친 후 다시 계단을 내려가던 한유설은 거의 다 내려왔을 때쯤 문이 잠기는 듯한 달칵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틀리에로 들어오기 전 바깥에 잠금장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든 한유설은 손에 든 물통을 내려놓고 서둘러 입구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고 문은 굳게 잠겨버리고 말았다. “뭐야? 정말 잠긴 거야?” 안쪽에서 열기 위해 이리저리 훑어보는데 열 수 있는 장치 같은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한유설은 두리번거리다 문득 어제 열쇠를 건네받았을 때 정수연이 이상하게 눈길을 피하던 것이 떠올랐다. ‘설마...’ 한유설은 분노를 참으며 일단 문제 해결을 위해 집사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걸었다. 하지만 휴대폰을 꺼내 보니 무슨 일인지 신호가 하나도 없었다. “...!” 그 시각, 일을 저질러버린 정수연은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별장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사실 그녀가 이런 짓을 한 건 어젯밤 유다정이 몰래 눈물을 훔치는 것을 봐버렸기 때문이다. 유다정은 왜 우는지에 대해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지만 한유설이 근처를 지나갈 때 유독 더 서럽게 울었다. 그 모습을 본 정수연은 한유설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머리를 잠시 굴리더니 곧바로 아틀리에에 감금시키자는 계획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유다정은 심해원과 잘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두 사람이 사귀기 전에 미리 호감을 쌓아두면 나중에 큰 이익을 받게 될지도 모르니까. 감금 계획을 얘기했을 때 유다정은 썩 내키지 않아 했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거절한 건 또 아니었다. 그래서 정수연은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하고는 오늘 아침 한유설이 아틀리에로 갔다는 얘기를 들은 다음 바로 그쪽으로 가 문을 잠가버렸다. 들키면 큰일 나는 일이기는 했지만 잘 되면 미래 심해원 아내의 신뢰를 얻는 일이라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며 과감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정수연이 몰랐던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아틀리에 안에는 한유설뿐만이 아니라 심해원도 함께 있었다는 것이었다. 한유설은 탈출구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렇게도 큰 방에 열 수 있는 창문 하나 없었다. 유일한 탈출구는 2층 베란다였지만 고소공포증이 심한 그녀였기에 그 생각은 얼른 접었다. “여긴 원래 열수 있는 창문도 없고 신호도 없는 곳이니까 힘 빼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그때 심해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심해원이 평온한 얼굴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래, 심해원이라면 탈출할 방법을 알겠지.’ 한유설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이는 듯해 긴장을 풀었다. “그럼 어떻게 나가면 될까요?” 심해원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이 오길 기다려야죠.” “...” 방법이 있을 거라 기대했던 한유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만약 아무도 안 오면요?” 그녀의 입에서 평소와 달리 짜증이 조금 묻어있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햇빛이 지나치게 충족한 곳이기도 하고 방금까지 청소를 마쳤던 터라 한유설은 지금 매우 더운 상태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혼자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이 인간은 지금 농담이 나오나?’ “후, 더워...” 심해원은 손으로 부채질하는 그녀를 힐끔 보더니 책상 쪽으로 다가가 서랍 안에 든 에어컨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버튼을 누르고 3초 정도 기다리니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에어컨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기다려봐요.” 한유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옆 나무 의자에 앉았다. 땀을 조금 들이고 나니 그제야 짜증이 가라앉는 듯했다. ‘정수연이 날 가둔 건가? 왜? 아니면 다른 사람? 내가 오늘 이곳을 청소하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한유설은 턱을 괸 채 누가 이런 짓을 했을지를 생각했다. 그러자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던 심해원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해요?” “누군지 아세요?” ‘그러고 보니 심해원은 베란다 끝쪽에 앉아 그림을 그렸었지?’ 심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 거네요? 누구였어요?” 아틀리에는 안도 밖도 CCTV가 따로 없어 그의 증언이 제일 결정적이다. 한유설은 심해원이 아무 말도 없자 다시 물었다. “혹시 이번 일 덮으려는 건가요?” 만약 일을 벌인 사람이 유다정이면 숨겨주려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아직 초반이라고는 하나 둘 사이에는 이미 정이 싹 텄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정말 유다정이 이런 멍청한 짓을 했을까? 이런 일은 한유설이 죽지 않는 한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다. 그런데 똑똑한 유다정이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아니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럼 빨리 누군지 말하라고.’ 한유설도 느긋한 편이었지만 심해원은 그 이상으로 더 느긋했다. “테라스로 올라와요. 한유설 씨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의 말을 해석하면 이러했다. “이런 짓을 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으면 잔말 말고 내 모델이나 서.” 한유설은 모델 경험이 전무했지만 돈 드는 일은 아니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2층으로 올라온 그녀는 어색한지 발을 움직이며 두리번거리다 먼저 입을 열었다. “대충 얼마나 서 있으면 돼요?” 드라마 같은 걸 보면 서 있는 모델이 많았기에 그녀는 심해원도 당연히 서 있는 모습을 그릴 거라 생각했다. “아니요. 나는 앉아있는 모습을 그릴 겁니다.” 심해원은 그렇게 말을 하며 의자 하나를 세팅해주었다. ‘다행이다.’ 한유설은 안도하며 의자에 앉은 후 어색하게 팔짱을 꼈다. 너무나도 어색한 포즈에 심해원은 피식 웃으며 친절하게 포즈를 알려주었다. “두 손을 양옆에 두고 다리는 조금 펼게요. 그리고 오른쪽 다리를 살짝 옆으로...” 확실히 어떻게 하라고 직접 지시해주니 편하고 긴장도 풀렸다. “혹시 얼굴을 다 그리면 얘기해주시겠어요? 일찍 일어났더니 조금 졸려서요.” 심해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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