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유설은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자도 된다는 얘기를 듣고는 스위치가 꺼지듯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따뜻한 햇살이 그녀의 몸을 포근히 감싸고 바람들은 살랑살랑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대충 묶었던 머리끈이 바람에 의해 풀리고 곧이어 기다란 머리카락들이 자유를 찾은 듯 멋대로 휘날렸다.
따뜻한 배경 속 나무 의자에 앉아 편히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심해원은 그 광경을 보며 문득 이대로 그녀를 소장하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붓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가하며 한참을 가만히 구경만 하다 잠시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유설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가슴 앞으로 떨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는데 계속해서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넘겨도 넘겨도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심해원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이번에는 방법을 바꿔 그녀의 귀 뒤에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살결끼리 서로 맞닿을 때 한유설은 잠시 움찔했지만 다행히 깨지는 않고 금방 다시 편한 얼굴로 돌아갔다.
머리를 넘긴 심해원은 이제야 만족한 듯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또다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를 원위치시켰다.
“...”
좋은 구도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다시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가슴팍에 있는 머리카락을 잡았다.
그런데 그때 간지러움을 느낀 한유설이 손을 들어 가슴팍을 누르며 천천히 눈을 떠버렸다.
한유설은 눈을 뜨자 보이는 심해원의 얼굴과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했다.
“뭐예요...! 그림 그린다면서요?”
심해원은 손을 거두어들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자꾸 흩날려서 뒤로 넘겨주려고 했어요.”
“아...”
한유설은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계속하세요.”
완성작품을 꼭 보고 싶었기에 그녀는 다시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러죠.”
심해원은 갑작스러운 자극에 얼어붙었던 손을 5초간 쥐었다 폈다 하더니 곧바로 다시 그림에 집중했다.
잠시 후.
심해원이 마무리까지 다 끝낸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원 씨, 안에 있어요? 해원 씨!”
유다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테라스에까지 울려 퍼졌다.
한유설은 찌뿌둥하게 굳어버린 몸을 천천히 뻗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심해원도 급할 거 없이 정리를 다 한 다음 느긋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심해원의 뒤에 선 한유설은 내려가자마자 보이는 유다정의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유다정이 담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속상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원 씨...”
심해원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괜찮다는 말만 건네주었다.
유다정은 정수연의 계획에 은근슬쩍 동참한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만약 심해원이 있는 줄 알았으면, 한유설과 함께 몇 시간이나 둘이서만 있을 줄 알았으면 절대 안 된다고 정수연에게 단호하게 얘기했을 것이다.
한유설은 심해원의 뒤에 서서 유다정과 윤세희, 그리고 정수연의 얼굴을 차례대로 자세히 훑어보았다.
‘셋 중 누구지? 정수연? 아니면 세 명 다?’
“은지 씨한테 이쪽으로 오라고 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심해원이 이 말을 한 목적은 정수연의 멘탈을 흔들어 놓기 위해서다. 원체 이런 짓을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이번 일로 인해 그 피해를 직접 받기도 했으니까.
그의 말이 끝난 순간 유다정과 정수연의 얼굴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확 굳어버렸다. 물론 유다정은 금세 다시 원래 얼굴로 돌아왔지만 정수연은 시선을 내리며 좀처럼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한유설은 셋 중 그 누구도 자신에게 괜찮냐는 질문을 건네지 않는 걸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하긴 동료애도 없는데 친구로서의 관심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다시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이미 11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고 심해원을 제외한 남주 세 명은 다이닝 룸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온시열은 심해원과 한유설이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젓가락을 멈추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우주한도 움직임을 멈추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심해원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한유설은 어쩐지 상태가 영 별로인 듯해 보였다.
백도운은 두 사람 다 멀쩡한 걸 확인하더니 다시 식사했다.
“누군가가 한유설 씨를 아틀리에에 가두려고 했어.”
심해원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범인은 네가 거기 있는 줄 몰랐나 보네?”
우주한이 물었다.
“응.”
우주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려 한유설을 바라보았다.
“아쉽겠어요. 조금 더 갇혀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가뜩이나 몸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은데 시비까지 걸어오자 한유설은 저도 모르게 조금 팩한 말을 내뱉었다.
“드시던 밥이나 계속 드시죠.”
“하하하.”
우주한은 박장대소하더니 재밌다며 허벅지를 두드렸다.
“그런 식으로 조금 더 얘기해주면 안 돼요?”
‘미친놈.’
한유설은 그를 한번 흘기고는 입을 꾹 닫았다.
심해원은 우주한이 뭐라 뭐라 얘기는 동안 문득 아까 그녀와 닿아버린 손등이 다시금 간질거리는 것 같아 시선을 내린 채 왼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깜짝 놀라며 커지던 눈과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온시열은 한유설의 몸 상태가 별로인 것을 눈치채고 우주한을 제지했다.
“그쯤하고 밥이나 먹어.”
“한유설 씨도 이만 식사하러 가보세요.”
심해원의 말에 한유설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상태에 가만히 있던 백도운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범인 얼굴은 봤어?”
백도운이 물었다.
“응, 은지 씨한테도 얘기했어.”
도우미를 뽑고 자르는 일은 모두 오은지의 소관이었기에 심해원은 그녀에게 모든 처리를 맡기기로 했다.
“그래.”
정수연은 지금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뛰었다. 그저 한유설을 잠깐 골려주려고 한 것뿐인데 설마 심해원도 거기에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은지는 이런 일을 대체로 엄격하게 처리하는 편이라 분명히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정수연은 살려달라는 얼굴로 맞은 편에 서 있는 유다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신호를 유다정이 봐줄 리가 없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한유설은 조정욱이 내린 따뜻한 차를 건네받았다.
“감사합니다.”
따뜻한 것이 들어가니 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심해원의 연락을 받은 오은지는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유설의 상태를 살폈다.
“유설 씨, 일단 오늘은 방에서 푹 쉬는 거로 해요.”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셰프님이나 집사님한테 얘기하고요.”
“이미 충분히 먹었어요. 그런데 조금 피곤해서 이만 방으로 들어가 볼게요.”
“그래요.”
오은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한유설이 이상한 짓을 하며 눈길을 끌려 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의 괴롭힘을 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한유설은 씻은 후 바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잠이 금방 쏟아진 것까지는 좋았지만 꿈은 영 평온하지 않았다.
꿈속의 그녀는 간절히 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남자는 잘생긴 얼굴로 내려다보며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향해 다가오다 점점 더 그녀를 벽 쪽으로 몰아세웠다.
“헉!”
한유설은 눈을 번쩍 뜨고서야 방금 봤던 장면이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연애경험은 물론이고 이성과 손을 잡은 경험도 없었기에 방금 꿨던 꿈은 상당히 자극적인 꿈이 아닐 수 없었다.
한유설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이 욕구불만인 건 아닌가 생각하다 금방 머리를 휘휘 저었다. 지금은 연애 같은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잘못 엮이면 원작대로 만신창이가 되어 쫓겨나 버릴 테니까.